2017. 8. 19. 14:43ㆍ책
생각의 시대 - 김용규
기하급수적으로 정보가 폭증하는 세계에서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속도보다 지식과 정보가 생산되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정보의 생산 속도가 우리의 학습 속도를 추월한 것이다. 기존의 학습방법으로는 추월당한 정보가 탄생하는 속도를 감당할 수 없다. 기존의 방법을 대체할 보다 근본적인 학습과 생각의 방법을 찾아내고 그것들의 필요성에 대한 함의를 깨닫고자 한다.
고대에 탄생했던 생각의 도구들을 탐색하고 지금의 상황에 더욱 절실해진 필요성을 강조한다. 저자는 2세기에서 4세기 사이의 300년에 주목하는데 이 때가 문명이 고도화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생각의 도구들은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하는데 이 도구들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의 의식에 가장 밑에서 진행되는 과정, 다시 말해 사고의 시작부터 살펴본다. 바로 1차적 의식인 범주화와 개념적 혼성이다. 범주화와 개념적 혼성을 통해서 우리는 외부 세계를 만들고 스스로의 정신 세계 또한 형성한다. 범주화의 근간에는 생존과 번성이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자신이 속한 사회를 유지하려는 욕구에서 탄생한 것이다.
생각의 도구들은 1차적 의식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도구들은 다음과 같다.
메타포라(은유), 아르케(원리), 로고스(문장), 아리스모수(수), 레토리케(수사)
은유는 창의력, 원리는 관찰력, 문장과 수는 논리력, 수사는 설득력을 갖게 한다. 도구들이 중요한 이유는 열거한 것과 같이 단순하지는 않다. 도구들이 의미하는 더 깊은 의미들은 책을 통해서 천천히 음미했으면 한다. 이 도구들은 유연하고 창조적이다. 단순히 창조적인 것을 넘어 포용적이다.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저자는 각 도굴의 설명에 아이들의 교육 방식과 엮어서 함께 설명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인 맺음말을 통해서 저자가 우리들에게 생각의 도구들을 쥐어주려는 이유를 말한다.
정보와 지식은 어디서든 전송받을 수 있지만, 진실과 지혜는 아무 데서도 전송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개별적이고 미시적이며 합목적적인 정보와 지식은 검색할 수 있지만 보편적이고 거시적이며 합리적인 전망과 판단은 검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 진정 필요한 것은 매 순간, 현장에서 오직 자기 자신에 의해 드러나는 진실과 지혜이고, 우리 사회에 필히 요구되는 것은 보편적이고 거시적이며 합리적인 전망과 판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우리의 손에 든 뇌가 아니라, 오직 머리 안에 든 뇌에서만 생성되기 때문이다.
이 뿐만 아니라 저자는 사회적 문제들과도 연관시킨다. 동일성으로 사고하는 오늘날의 사고방식은 많은 사회적 문제들을 야기시키기 때문이다. 생각의 도구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단순하지 않다. 생각의 도구들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요소는 유사성이고 이것은 우리를 경계를 허물고 서로 융합하도록 이끈다. 바로 이러한 점이 오늘 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이유다.
이 책은 우리가 많은 정보들을 가지고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지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앞으로의 인공지능과 기계가 어떻게 설계되고 있는지와 설계되어야 할지를 제시해주고 있기도 하다. 사고의 능력 조차 인간만이 가지고 있게될 도구들은 아니다. 현재의 인공지능은 유사성을 배우고 있다. 우리는 신체능력뿐 아니라 사고능력까지 기계에 추월당하고 있다. 창조성마저 뛰어넘은 기계들과의 공존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생각의 도구들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노력은 현재에 존재하는 사회적 문제뿐 아니라 단순히 다름으로 발생되는 모든 분야의 문제점을 고쳐나아가 지금보다 더 풍부하고 풍요로운 세상을 만드는데에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유연하고 창조적인 생각의 도구들을 쥐게된다면 생각은 더 유연해지고 더 넓은 시야를 통해서 다양성을 보며 그 넘어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서론
지식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접속의 대상이 되었고, 교육과 전수의 내용이 아니라 검색과 전송의 내용이 되었다.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격변하는 환경을 꿰뚫을 수 있는 보편적이고 거시적이며 합리적인 전망과 판단을 획득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그에 합당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사고 능력을 확보할 수 있느냐에 쏠려 있다. 한마디로, 지식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생각의 시대다!
생각은 무한한 대상들(자연, 사회, 인간 등) 앞에서 혼란스러워진 우리의 정신이 질서를 이끌어내는 방식이다. 복잡한 대상들을 단순한 패턴을 만들고, 이러한 패턴들이 엮여서 더 크고 복잡한 패턴을 만든다. 생각의 도구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생각의 패턴이다.
생각의 패턴 = 생각의 도구
지식은 인간이 주어진 자연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생존경쟁(struggle for existence)을 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조건화 현상은 외부 자극에 신체가 먼저 반응하는 현상이다. 언어 이전의 심리 현상인 조건화 현상은 1차적 현상이다. 논리적 함축은 고차적 현상이며 언어와 기호를 통해서 만들어진다. 이 고차적 현상을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관념을 갖게 된다. 바로 자기 자신과 세계를 모형화(모델링)한다.
인간은 어떤 지식도 유전자를 통해 전해 받지 못한다. 하지만 진화보다 학습이 더 빠르고, 더 유연하게 진행된다. 학습이 진화보다 변화에 더 잘 적응하게 해서 생존에 더 적합하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지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서로 다른 영역의 지식이 융합되어 인류는 또 다른 문명의 시대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느냐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는 마땅히 2세기에서 4세기 달아하는 300년을 주목해야 한다. 그 시대에 그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의 도구들을 사용해서 지식을 융합 했는지 알아봐야 한다.
인류가 어느날 보편성을 발견했다. 어떤 법칙, 인간이라면 지켜야 할 도덕법칙, 자연의 법칙. 보편성으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이 신화에서 자연으로 이동했다. 보편성은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고 조종하게 하는 힘을 지니게 했고 이론적 차원에서 여러 사람이 토론할 때 대중의 동의 얻어내는 설득하는 능력을 가졌다. 바로 보편 타당성. 이것은 인간을 설득하여 해동하게 만드는 힘이다.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할 매우 중요한 두 가지의 질문이 있다.
- 왜 이 시기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편성을 추구했는가?
- 어째서 보편성의 추구가 왜 동양에서는 종교와 도덕의 발달로 나타난데 비해 서양에서는 학문의 발달을 이루었는가?
보편성 추구 견해
고대인의 탐구심은 자연을 이해하여 조종하고 인간을 설득하여 움직이게 하는 힘, 곧 보편성을 획득 하려는 욕망에서 시작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축의 시대?의 고대인들에게 있어 보편성은 자연의 법칙인 진리와 인간의 법칙인 미덕의 근거였다. 그것은 변함없는 자연법칙이자 마땅히 따라야 할 도덕법칙이었다.
동서양의 서로 다른 학문 발달 견해
동양과 서양 두 사회의 생태 환경이 경제적 차이를 가져왔고, 이 경제적 차이가 다시 사회구조의 차이를 초래했다. 그리고 사회구조적인 차이는 각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규범과 육아 방식을 만들어냈고, 이는 환경의 어떤 부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를 결정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주의방식은 우주의 본질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민속형이상학)를 낳고, 이는 다시 지각과 사고(인식론)의 차이를 가져왔던 것이다.
1차적 의식(조건화 현상)에서 만들어지는 도구를 살펴본다. 여기서 생각이 시작되며 최근 연구에서 새로운 사실들이 쏟아져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의 시작인 범주화와 개념적 혼성, 범주화의 과정과 그 과정이 어떻게 이성이라는 생각의 도구를 탄생했는지 알아보고 그 바탕에 어떤 욕망이 깔려 있으며 그것이 인류에게 무슨일을 했는지 알아본다.
1차적 의식(조건화 현상)
범주화란 동물들이 생존을 위해서 자신이 마주하는 환경을 구분하는 작업이다. 유사성으로 우리는 범주화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동일성이 아닌 유사성이라는 점이다. 유사성은 범주화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사고와 언어를 구성하는 기반이 된다. 언어의 주목적은 내 말을 듣는 사람의 정신 속에 내 것과 비슷한 이념을 일깨우는 데있기 때문에,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개별적 이름이 아니라 유사성을 통해 표시할 수 있는 보편적 표현으로 충분하다.
더 많은 행동능력을 가진 동물들이 그만큼 많은 사물들을 인지하여 범주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는 뜻이다. 동물들의 인지능력이 기본적으로 지능이 아닌 신체에 의해서 좌우된다. 무엇을 할 수 있냐에 따른 신체능력을 말한다. 윅스퀄은 이렇게 동물들이 범주화를 통해 스스로 구성한 가장의 세계를 환경 세계라 불렀다. 행동능력이 곧 인지능력이고, 인지능력이 곧 행동능력이다.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으로써 살아가는 세상을 내놓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바로 그것을 해야 합니다.' 범주화는 세계를 만드는 행위이다.
더불어 행동능력으로 실행되는 범주화가 외적으로는 세계를 구성하지만, 내적으로는 인간의 정신(지능)을 형성한다는 사실이다. 범주화 능력에 비례해서 지능이 발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범주화를 통해 고차적 의식에 도달한다. 이것을 통해 영아들의 행동발달을 돕는 행위가 인지발달을 도울 수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생각은 범주화를 통해 생성된 개념들이 서로 결합하여 개념적 꾸러미를 형성하면서 비로소 생각들이 만들어지는데 두 저자는 우리의 뇌에서 일어나는 이같은 현상을 개념적 혼성이라고 이름 지었다. 우리의 뇌는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내기 위해 서로 다른 지식과 경험 영역에서 끄집어낸 정보들을 마구 섞어 서로 만나게 해 새로운 새로운 개념적 꾸러미를 만든다. 저자들은 이런 일을 하는 정신 공간을 혼성 공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처럼 뇌신경들이 연결망을 이루어 만든 혼성 공간에서 2개 이상의 개념들이 만나 서로 달라붙어 새로운 개념들을 창조하는 일은 '압축' 또는 개념적 통합' 이라 한다. 이 같은 개념적 혼성이 일어나는 혼성 공간은 새로운 개념들이 태어나는 분주한 산실이자 상상력과 창의력이 작동하는 거대한 실험실이다. 혼성 공간은 혼돈이 아니다. 무의식적으로 일어나지만 무작위로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은 동물이다 처럼 혼성 공간을 통해 서로 다른 존재의 공통된 부분을 뽑아서 혼성 공간에 투사된다. 혼성 공간은 이 대응 요소들을 근거로 다른 존재들을 합성하여 사람은 동물이다라는 말을 만들었다. 인생은 마라톤이다 라는 은유 문장도 마찬가지다.
혼성 공간은 언제나 대응 요소들만 투사되는 것은 아니다. 비대응 요소들도 함께 입력된다. 인간은 문화적 동물이다. 인간과 동물의 대응 요소인 운동, 감각, 소화 뿐 아니라 이성과 같은 비대응요소가 함께 투사되어 형성되었다.
앞서 보편성에 관해 설명하였는데 보편성이 어떤 범주화와 개념적 혼성이 이루어왔는가를 살펴본다.
왜 동서양의 모든 문명이 왜 신화와 전설로부터 시작하는가? 이러한 이야기는 어떤 태도가 그 사회에서 훌륭하다고 판단되는 본보기이며, 또 어떤행위가 모두에게 지탄을 받는 금기인지를 가르쳐준다. 그 공동체의 도덕과 법들의 근간을 형성한다. 요컨대 이야기가 기즘까지 우리가 다룬 추상적이고 윤리적인 개념들의 범주화를 가능케 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인간이 어떤 집단의 이야기들을 듣고 그것에 길들여 진다는 것은 그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이며 그 사회에서 능력을 발휘할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야기를 통해 끊임없이 도덕적 범주화와 보편화를 꾀하는 생각의 은밀한 욕망이 무엇인지도 알려준다. 생존과 번성이 그것이다.
호메로스가 씨앗을 뿌리고, 이후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 키운 생각의 도구들을 차례로 살펴볼 것이다. 메타포라(은유), 아르케(원리), 로고스(문장), 아리스모수(수), 레토리케(수사). 이것들이 우리의 사고와 언어를 어떻게 만들어가며, 학문과 예술,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어떤 역할들을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앞서 우리는 생각의 도구들이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확인했다. 은유는 자연을 이해하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모든 곳에 사용된다. 원리와 수는 주로 자연을 이해하여 조종하는 데 사용하고 문장과 수사는 애초부터 사람들을 설득하여 움직이는 데 사용되었다.
범주화와 혼성을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이라는 점에서 1차적 생각의 도구 또는 생각 이전의 생각이라 이름 붙였다. 이제부터 우리는 2차적 혹은 일상적 생각의 도구를 알아본다. 그만큼 우리에게 가깝고 학습을 통해 그 사용법을 익힐 수 있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이러한 도구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일상에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앎의 폭이 좁아 능력의 범위가 축소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생각의 도구
메타포라(은유)
은유가 우리의 사고와 언어 그리고 학문과 예술을 구성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도구다. 은유는 수사적 은유와 사회,문화적 은유로 구분할 수 있다. 사회문화 은유는 우리의 사고와 언어에서 원초적이고 근본적이라는 의미에서 1차적 은유라고 이름 붙였다.
오늘날 학자들은 은유를 보통 대상이 가진 본래의 관념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유사한 특성의 다른 사물이 가진 관념을 써서 표현하는 비유법이라 한다. 은유에 능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사물들의 유사성을 빠르게 간판할 수 있는 것. 하지만 은유는 유사성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다. 은유는 보조관념에 원관념이 갖고 있지 않은 비유사성, 어떤 낯선 것이 필히 들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은유의 역할 가운데 다른 하나인 의미의 변환이나 확장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새로운 의미의 창조가 우리를 새로운 사고와 언어의 세계로 이끈다. 은유는 다른 현실의 장을 열어 밝힘으로써 우리의 일상과 세계의 진부함을 떨쳐내며,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어놓는다 리쾨르는 이처럼 기존의 범주를 깨고 새로운 범주를 찾아내는 것이 은유의 힘이라 했다.
유사성과 비유사성이 은유를 떠받치는 2개의 기둥인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은유는 서로 다른 두 사물을 그들이 가진 유사성으로 묶어 그 유사성 안에서 보편성(본질 또는 진리)을 찾아내는 생각의 도구로 쓰였다. 그러나 예컨대 귀납법과 같은 보편성을 탐구하는 다른 생각의 도구들이 개발된 이후 점차 변해, 특히 오늘날에는 은유가 다른 현실의 장을 열어 밝힘으로써 창조적 기능을 하는 도구로서 더 주목을 받고 있다.
보편성이란 대상의 본질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모든 것에 두루 통하거나 미치는 성질을 뜻한다. 때문에 보편 타당성이라고 불리는 그것이 자연을 이해하여 조종하고 인간을 설득하여 움직이는 힘을 가졌다. 이말은 서사시뿐 아니라 자연과학과 논리학과 같은 학문들에서도 핵심적 역할을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은유는 유사성을 통해 보편성을, 비유사성을 통해 창의성을 드러내는 천재적인 생각의 도구다.
은유의 학습을 위해 우선 추천하고 싶은 것은 시이다. 은유를 배우는 것은 단순히 감성적 취향을 고양시키는 일이 아니다. 우리의 뇌안에 은유를 창출하는 신경망을 새롭게 구축하는 것이다. 시인들이 은유를 통해 자기가 표현하려고 하는 내용을 이미지화 하는 데에서 나온다. 시각적 사고란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만들어내거나 떠올려 그것을 조작하고, 덮어씌우고, 해석하고(비유 등의 방법으로), 유사한 형태와 연관 짓기도 하고, 회전시키고, 크기를 늘리거나 줄이기도 하고, 하나의 익숙한 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 단계적으로 변형시키기도 하는 사고방식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모두가 자신들의 창의적인 작업에 은유라는 새각의 도구를 사용한다. 그런데 서로 다른 사물들의 유사성을 재빨리 간파함으로써 얻어지는 은유는 언어보다는 패턴 인식을 통해 먼저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의 뇌가 개념적 혼성을 할 때 새로 입력된 요소들의 패턴을 인지해 그것을 바탕으로 은유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글자는 느리고 이미지는 빠르다.
뇌는 심지어 언어보다 먼저 패터 인식에 의해 기능하기 때문에, 뇌는 이른바 전은유적 능력들을 생산한다. 그런 유추능력들은 특히 나중에 언어로 전환되었을 때에는 신경망의 퇴행성에서 비롯되는 연합성에 의존한다. 그 결과로서 발생하는 은유능력의 산물들은 불가피하게 모호한 반면 매우 창조적일 수 있다.
은유의 교육이 중요한 이유는 은유가 범주화를 통해 생겨난 첫번째 생각의 도구이자 다른 모든 생각의 도구들의 모태이기 때문이다. 5세 전후의 아동들은 끊임없이 은유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커감에 따라 은유의 사용이 줄어드는데 유상성이 아닌 동일성을 기반으로 교육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교육 방법은 이것을 취하되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지혜가 해법이다.
두 대상들의 공통점인 개념을 이끌어내는 일을 추상화라 한다. 추상화란 간단히 말해 복잡한 대상 또는 대상들에서 단 하나의 공통된 특징만을 제외하고 모두 제거함으로써 어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내는 작업이다.
아르케(원리)
원리는 자연과 사회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관찰하고 그 관찰 결과를 사고하고 추론하여 만들어지며, 그 결과가 자연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실 또는 변화에 맞아 떨어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관찰-추론-검증이 원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관찰이 먼저다. 우리는 세계를 정밀하게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행동의 패턴들을 구분해내고, 패턴들로부터 원리들을 추출해내고, 사물들이 가진 특징들에서 유사성을 이끌어내고 행위의 모형을 창출할 수 있으며 효과적으로 혁신할 수 있다.
유사성도 관찰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관찰력을 가질 수 있는가? 사소한 것을 놓치지 마라. 관찰력을 가져라. 라는 말들은 대단히 추상적이라 와닿지 않는다. 좋은 방법은 필드노트를 갖는 것이다. 이 말은 현장에 나가서 세밀하게 기록하라는 뜻이다. 기록은 현대 시대에서 다양하게 할 수 있다. 필기뿐 아니라 영상 촬영, 녹음과 같은 형태다. 무엇보다 기록이 중요한 의미는 대부분의 새로운 통찰은 세밀히 기록하는 과정에서 얻어지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뛰어난 관찰자들은 단순히 글로 기록하거나 사진을 찍는 것 외에 드로잉 곡 그림 기록의 중요성을 입을 모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상을 직접 그리는 과정에서 더욱 세밀한 관찰과 풍부한 발견 그리고 깊이 있는 이해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기록은 단순하지 않다. 재창조의 과정이다. 관찰의 완성은 치밀한 사고가 있어야 한다. '내용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관찰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사고없는 관찰은 맹목이다.
가추법은 관찰을 통해 드러난 어떤 특이한 현상으로부터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을 결론으로 이끌어낸다. 하지만 가추법은 항상 참이 아니다. 필연적 참이 아닌 개연적 참일 뿐이다. 그래서 결론이 가설인 것이다. 가추법은 가장 창의적인 추론법이지만 동시에 가장 오류 가능성이 높은 추론법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날 가추법에 검증 절차를 덧붙인 새로운 탐구 방법을 고안했다. 가설연역법이다.
조사 중인 대상이나 문제를 밝힌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가설을 설정한다.
그 가설이 현실세계에 들어맞는 경우 일어날 예측을 내놓는다.
그리고 실제 세계에 대한 실험과 관찰에 따라 자료를 수집하여 예측과 일치 또는 대응하면 수용하고 아니면 수정되거나 또는 폐기한다.
가설연역법에 따른 사고가 과학 이론을 세우는것 뿐 아니라 비판적 사고능력을 기르고 일반적 과학 교양을 쌓는데도 도움이 된다.
가설연역법을 실행 및 평가할 수 있는 구체적틀
현실 세계 : 의문을 갖는다.
모델 : 가설을 세운다.
예측 : 의문에 가설을 적용한다.
자료 : 조사한다.
부정적 증거 : 예측을 부정하는 증거를 찾는다.
긍정적 증거 : 예측에 긍정하는 증거를 찾는다.
증거들로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가추법을 사용하느냐 마느냐는 당신이 논리적으로 안전한 입장을 취하면서 미미한 결과에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논리적 오류 가능성을 받아들이면서 의미심장한 결과로 과감히 나아갈 것인가에 달렸다.
논리적 추론은 형식적 조작기인 11세 이후에 가능하다고 한다. 형식적 조작이란 추상적 사고의 특성이다. 어머니를 사랑하거나 친구를 미워하는 논리적 추론을 넘어 평화를 사랑하거나 불평등을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논리적 추론능력은 교육 내지 훈련받지 않으면 전혀 발달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가추법을 별도로 훈련해야 하는 까닭은 오늘날 학교 교육이 논리학 교육을 거의 하지 않는 데다, 논리적 추론을 자연스레 훈련할 수 있는 일반 교재들은 그 내용이 연역법이나 귀납법에 의해 전개되기 때문이다. 단지 과학 실험시간에 일부 청소년들이 가설연역법을 잠시 경험할 뿐인데, 이 경우에도 그것이 과학 실험 외에도 폭넓게 쓰일 수 있는 문제 해결의 추론법이자 탐구의 논리라는 사실은 배우지를 못한다. 요컨대 오늘날 청소년들은 가추법을 배우고 훈련할 기회가 거의 없다. 어느 때보다도 창의성이 요구되는 시대에 부합하지 않는다.
가추법의 훈련 중 A가 참이면 특정 속담이 참인가? 하는 문제를 들수 있다. 예를 들어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라는 속담은 어떨 때 참이 될 수 있는가 라는 문제를 내는 방식이다. 가추법을 훈련하는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탁월한 방법은 뭐니뭐니해도 탐정소설 읽기다.
로고스(문장)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선 문장이 자연적인 도구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합의에 의해 사용하는 인위적인 생각의 도구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어서 문장은 명제를 나타내야 한다고 했다 명제란 참 또는 거짓으로 구분되는 생각을 말한다. 이 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이나 글 모두가 로고스로서의 문장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로고스로서의 문장은 사물이나 사건에 관한 정보라는 성격뿐 아니라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논증적 특성도 함께 갖고 있어야 한다. 형식적으로 말하자면 문장은 명제의 언어적 표현이다.
여기서 궁금증은 사람들은 왜 언어에 이 같은 특별한 기능이 생겨난 것일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왜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논증적 기능을 가진 언어가 필요했을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사건적 기능과 논증적 기능 등 두 가지의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사건적 기능은 흥미로워 보이는 정보라면 뭐든지 서둘러 동료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하고 논증적 기능은 그렇게 전해진 정보가 믿을 만한지를 검증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단순히 문장이 정보를 논리적 기능을 위해 개발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포괄적인 다른 요인은 다른 사람을 설득하여 움직이는 헤게모니를 갖기 위해서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참이나 거짓이 될 수 있는 대상은 사물이나 사실이 아니고 우리의 사고와 언어임을 분명히 했다. 영국의 철학자 버튼런드 러셀어는 달에는 사실은 있지만 참이나 거짓은 없다고 했다. 월석을 월석으로, 더운 것을 덥다고, 추운 것을 춥다고 판단하고 표현할 사고와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세계 자체에는 진리도 허위도 없다. 진리란 우리의 사고와 언어가 갖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다. 아리스토텔레는 형이상학 에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거짓과 참은 사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좋은 사물이 참되고, 나쁜 사물이 거진인 것이 아니다. 거짓과 참은 오직 우리의 사고 안에 있다.
문장은 우리가 우리의 생각들을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분석하고 검증할 수 있게끔 진화해왔다. 진화의 목적은 산문을 쓰거나, 설득력을 갖거나, 진리를 구축하거나, 이상적인 논리언어를 만들거나, 컴퓨터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게 하기 위해서 처럼 시대와 분야에 따라서 다르다. 하지만 이들 모두의 한결같은 꿈은 문장을 통해 우리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문장은 우리가 생각을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다시 말해 이성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이고 효율적인 도구다. 우리는 은유를 통해 창의력을 키울 수 있다. 그러나 논리력을 향상시킬 수는 없다. 우리는 오직 문장을 통해서 논리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설득력의 핵심인 언어적 논리력은 오직 문장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관심은 구체적으로 문장이 가진 어떤 요소가 우리의 논리력을 향상시킬까? 와 어떻게 해야 논리력을 획득할 수 있을까? 이다.
아이들이 전조작기에서 구체적조작기로 옮겨 가려면 뇌신경의 발달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이것보다 교육을 통한 문장 읽기와 쓰기 훈련이 더 중요하다. 읽기와 쓰기 능력을 갖지 못한 사람은 추상적, 논리적 조작을 거의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역사 인식과 자아 인식마저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다.
문자는 사고를 좀 더 명확하게 한다. 읽기는 아동들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 뿐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혼동이나 잘못이 없는지를 점검하게 한다. 또 쓰기는 단순히 자기 생각을 표현하게 할 뿐 아니라 아동에게 처음으로 독자의 입장이 되어서 자신의 생각에 부족한 것이나 잘못을 발견하게 한다.
문자는 또한 생각을 좀 더 의도적이고 구체적으로 만든다. 글을 읽을 때는 말을 들을 때보다 더욱 많은 상상력과 집중력이 필요하고, 글을 쓸 때는 생각을 더욱 신중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글은 아동들에게 언어의 구성요소와 그것들이 맺는 구조를 구체적으로 알게 한다. 모든 글에는 낱말 간의 관계, 문단 의미 사이의 관계를 지배하는 규칙이 있다. 보통 문법 또는 보다 세분해서 통사론(syntex)이라고 하는데, 아이들은 말을 배우고 사용하면서 언어의 기본적인 구조를 익히게 되지만, 글을 읽고 쓰면서 그것을 구체화하게 된다.
통사론은 곧 우리가 말하는 문장의 논리적 구조는 우리의 모든 사고들(고차적의식) 내지 비고츠키가 말하는 고등 정신기능이 제길을 찾아가게끔 하는 일종의 정신 지도로 작용한다. 통사론을 익히지 못하면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일체의 추상적, 논리적 사고를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과거-현재-미래와 같은 시간 관념도 갖지 못한다. 뇌신경학자들은 아이들이 언어를 습득하면서 뇌에 시간장이 형성되고 시간장이 형성되면서 과거를 인식하고 과거의 기억을 통해 현재를 이해하며 또 과거에 대한 인식과 현재에 대한 이해가 모여 미래에 대한 개념이 생겨난다는 것을 확인했다. 시간의식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매순간 상황을 판단하고 앞으로 해야 할 행동을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이 같은 판단과 선택이 차츰 자기의식을 형성한다.
요점은 이 모든일을 언어가 한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언어가 아예 없거나, 침팬지처럼 미약한 동물들에게는 시간의식도 없거나 미약하다 동물들은 단지 시작을 통해 얻어진 장면들이 마치 스냅사진처럼 존재하는 현재라는 독재자에 얽매어 산다. 추상적인 개념을 마음에 새기고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일은 하지 못한다. 당연히 시간의식, 역사의식, 자기의식이 없다. 한마디로 언어가 인간을 인간이게 한다.
자기의식, 의식, 정신 따위는 언어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따라서 그것들 자체는 오직 사회적 영역 안에서 일어난다.
문장은 자신의 논리적 구조인 통사론(문법)을 통해 인습적이고 일상적인 말의 순서나 문법에 맞는 단어의 사요을 정하는 역할을 훌쩍 뛰어넘는 일을 한다. 이것은 우리의 뇌안에 철학자들이 한결같이 추구했던 자연과 사물들의 질서에 합당한 정신의 모형을 형성하게 한다.
통사론은 보다 정교한 정신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통사론은 항목들 사이의 관계를 여러분의 근원적인 정신의 모형 속에 구성하는 일과 관련된 것으로서, 표면적인 내용(주어-동사-목적어의 어순이나 어형의 변화) 따위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런 표면적인 내용은 일종의 단서에 불과하다.
아이에게 정신적 문법을 익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아이에게 소리내어 책을 읽어 주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컴퓨터에 내장된 하드디스크가 아니다. 인간 뇌 구조의 핵심적 특성은 경험에 따라 크기와 구조가 바뀌는 가소성이다. 독서는 뇌가 새로운것을 배워 스스로를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인류의 기적적인 발명이라고 한다. 이것이 우리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어야 하는 뇌과학적 이유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글을 읽을 줄 아는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어야 한다.
읽기가 문장을 익히는 수동적 수단이라면 쓰는 능동적 방법이다. 글쓰기 좋은 방법들이 있지만 쉽게 글쓰는 방법은 베껴쓰기다. 문장 도식화(꽃게 도식) 역시 좋은 방법으로 아이의 정신세계를 확장할 수 있으며 동시에 확인할 수 있다. 문장 도식은 예컨데 시간의식이 아직 생기지 않은 아이의 말에는 언제라는 표현이 없고 공간의식이 없는 아이는 어디서라는 표현을 하지 않으며 목적의식이나 인과관계에 관한 의식이 아직 생기지 않은 아이의 언어에는 왜나 왜냐하면이라는 표현이 없을 것이다.
언어(문장)가 무엇인지 그리고 언어(문장)가 인간이라는 종에 어떤 일을 했는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한, 우리 자신도 세계도 이해할 수 없다. 언어(문장)는 분명 인간이라는 종을 만들고 우리가 사는 세계를 만들었다.
아리스모스(수)
원리와 마찬가지로 수도 자연이 합리적인 패턴으로 드러나게 하여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조종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마치 은유가 그런 것처럼 수가 없이는 우리의 정상적인 사고도 언어도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에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등장함과 20세기 초 괴델의 불완전성원리가 발표되면서 수학이 완전한 체계가 아님이 증명되었다. 수학이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했던 자연의 원리나 진리를 발견하는 도구가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진리란 단일하고 완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수학은 인간의 다른 생각의 도구들과 마찬가지로 불완전한 인간의 불완전한 발명품에 불과하다는 식의 주장들이 쏟아져 나왔다. 영국의 수학자 마이클 아티야가 "인간이 물리적 세계의 요소를 추상화하고 이상화함으로써 수학을 창조했다"라고 선언한 것이 그 한 예다.
수학이란 자연의 원리 또는 신의 진리를 발견해내는 도구일까? 아니면 생존과 번영을 위해 우리가 발명해내는 도구일까? 아직은 모를 일이다. 어쩌면 진실은 양 극단의 중간 어디쯤에 있을지 모른다. 수학은 어느 정도는 자연의 본성이고, 어느 정도는 인간의 본성일 수 있다. 수학 가운데 일부는 발견되기도하고 일부는 발명 되기도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양 극단이 모두 옳을 수도 있다. 수는 자연의 본성이자 동시에 인간의 본성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만물의 궁극적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발견이냐, 발명이냐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바로 이것이 피타고라스의 신념이고, 플라톤이 기꺼이 이어받은 '피타고라스 스타일'이다.
피타고라스와 그의 학파 사람들에게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수학과 과학, 그리고 예술을 구분하지 않고 통합된 하나라고 보았고 그것을 탐구하는 일을 지혜(sophia)에 대한 사랑(philos), 곧 철학(philosophia)이라고 했다. 그들은 간단한 방법으로 시각화함으로써 산술과 기하학을 연관시켜 생각할 수 있었다. 또 수적 비율과 음정의 관계를 파악하여 수를 청각화함으로써 산술과 물리학을 연결시킬 길을 열었다. 수학의 지각화 또는 이미지화. 이 발상으로부터 자연의 수학화라는 사유가 가능해진 것이다. 자연의 수학화와 수학의 지각화가 피타고라스 스타일의 핵심이다. 그에게 수가 곧 철학이고 철학이 곧 수학이다. 이 점은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한 가지의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 보여주는 거울이 된다.
오늘날 자연의 수량화를 통해 근대인들이 얻은 것은 자연을 물리적 탐구의 대상으로 파악함으로써 자연과학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수량화를 통해 잃은 것은 자연을 개발의 대상이자 정복의 대상으로 봄으로써 오늘날 문제가 되는 온갖 비극적 난국과 파국의 불씨를 심었다는 것이다. 수로 계량된 자연은 양적 대상일 뿐 더 이상 아름답고 신성한 대상이 아니고, 수로 계량하는 인간은 자신의 탐욕을 양적으로 실현하는 존재일 뿐 더 이상 검소하고 신중하며, 타인에 대한 존중, 약자에 대한 배려, 생명과 자연보호 등을 실천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 결과 피타고라스가 교훈한 조화가 깨어지고 자연과 인간이 함께 병들어가고 있다.
몰아세움(das tellen)과 닦달(das gestell)이라는 용어를 개발한 하이데거를 통해서 이러한 단어가 성한 곳에서는 토지이든, 식물이든 인간이든 그것들이 전에 갖고 있던 고유한 자립적 본질, 혼을 가준 본질 또는 신에 의해 창조된 본질을 유지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이제 사물들의 본질뿐 아니라 자신의 본질마저 상실해가고 있다. 모든 대상을 수량화하여 도구 또는 부품으로서 취급하고, 그것에 적응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의 본질마저 위장하여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닦달은 본질적으로 위험으로서 존재하고 있다'라고 경고했다. 이 경고는 자연의 수량화가 아니라 자연의 수학화를 추구했던 피타고라스 스타일로 돌아가라는 의미로 들린다.
철학자뿐 아니라 과학자들 역시 사고의 전환을 종용했다. 양자 물리학이나 인지생물학과 같은 새로운 과학들이 자연은 인간과 불리된 객관적 대상이 아니고, 오직 인간의 물음과 행위에 의해 드러나는 상호주관적 현실이라는 사실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새로운 세계관이 요구하는 것은 수를 통한 자연의 정복이 아니라 수에 의한 자연과의 조화, 곧 피타고라스 스타일이다.
21세기에 이제 필요한 것은 지식들의 분화가 아니라 융합이다.
어느 때보다도 정보의 접속과 융합이 광범위하고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지금 이 시대가 불러올 거대한 변화가 무엇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하지만 그것 가운데 하나가 학문과 예술, 학문과 종교 또 학문과 학문 간의 융합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수학을 다른 학문, 예술들과 연결하여 사고하고, 그것에 미학적, 형이상학적, 윤리적 의미를 부여한 피타고라스 스타일을 주목해야 하는 다른 하나의 이유다.
수학자들은 수학이 하나의 언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왜 아이들이 언어는 자연스레 배우는 반면에 수학은 그렇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 이유 가운데 결정적인 하나는 오늘날 아이들이 만나는 산술과 수학이 마치 기호논리학이 그런 것처럼 대부분 숫자라는 추상적 기호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것이 무미 건조하고 지루하다. 그래서 제시하고자 하는 교육방법이 피타고라스 따라하기다.
수학을 단지 계량과 계산 도구로서가 아니라 자연과 사회 그리고 예술을 탐구하는 도구로서 인식하게끔 교육하자는 말이다. 가능한 한 수학을 이미지화하여 다른 학문 내지 예술과 연결시키고, 철학화하여 수학에 미학적, 형이상학적, 윤리적 의미를 부과하여 교육하자는 뜻이다.
성인들과 달리 아동들의 논리수학적 지식은 지각적 경험과 그에 대한 성찰에서 얻어진다. 아직 형식적 조작기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많은 아동들이 수학을 기피하거나 두려워하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시각적 또는 청각적 이미지를 통해 어릴 때부터 심리적 거부감을 덜어주면 그것이 논리수학적 능력 향상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다시말해 아이들의 논리수학적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들의 흥미와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 그런데 아이들의 흥미와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탁월한 하나가 시각적 또는 청각적 이미지를 통해 수학을 교육하는 것이다.
이제 컴퓨터 기술의 발달로 수학적 대상들을 시각적으로든 청각적으로든 이미지화하는 일, 그리고 수학을 다른 학문과 예술, 더 나아가 실생활과 연결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일들을 부단히 시도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얻어진 결과물들을 이용하여 아이들에게 수학을 교육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수학에 흥미를 가질 것이며, 수를 단순한 계량과 계산의 도구가 아니라 창의적인 도구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레토리케(수사)
수사는 본디 설득을 위한 생각의 도구로 개발되었다. 수사를 위한 초기의 기술은 문학적 표현을 사용하여 상대를 설득하는 미사여구법(elocuio)이었다. 초기의 수사는 너나 할 것 없이 미사여구(은유적 표현)를 사용한 감동시키기였다.
5세기 이후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같은 소피스트들이 적극적으로 개발한 이래 , 수사가 단순한 문학적 기예가 아니고 설득의 도구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논증을 끌어들인 것인데 그 이유는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은 말은 그것이 아무리 감동적이라 하더라도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점차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런 수사를 논증적 수사 또는 수사적 논증 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의 힘은 감동이 아니라 확증이다.
고대와 중세 사람들이 수사학에 열광했었다면 르네상스 이후부터 수사학은 차츰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근대는 확실성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수사가 아닌 수학과 논리학, 자연과학으로 사람들을 설득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수사학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민주주의 보편화와 함께, 그리고 포스트모던 시대의 도래와 함께 설득의 시대가 부활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수사라는 생각의 도구가 가진 놀라운 힘을 가장 쉽고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곳이 광고다. 광고는 수사다. 그 뼈대는 논증적 수사이며 그 살은 문예적 수사다. 이것이 30초짜리 광고가 3시간짜리 영화나 300쪽짜리 책보다 더 설득력 있는 이유다. 관건은 설득력이고, 설득을 위해서는 수사가 필요하다.
수사학은 민주주의, 그리고 상대주의와 함께 자라났다. 어떤 것이 절대적 진리인양 지배하는 땅에서는 수사학도 민주주의도 자라지 못한다. 반대로 민주주의가 성한 곳에서는 상대주의와 수사학이 판을 친다.
수사학은 시기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문학과 논리학의 중간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언제나 문학과 논리학 그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있다. 그 한 다리가 문예적 수사이고 다른 한다리는 논증적 수사다. 그 하나고 감동에 주력하고 다른 하나가 확증하기에 매진한다.
예증법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수사적 논증 기법 가운데 가장 널리 사용되며 또한 가장 뛰어난 설득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증법은 예를 근거로 하여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수사적 논증이다. 예컨대 나쁜 음식은 몸을 병들게 한다와 마찬가지로 나쁜 생각은 정신 건간을 해친다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 가운데 예증법을 사용한 경우다. 부분과 부분이 유사성을 갖고 있고 그중 하나가 잘 알려진 것일 때, 그것이 잘 알려진 한 부분에서 다른 한 부분으로 진행하는 추론이다.
생략삼단논법은 증명보다 설득을 위한 것이다. 형식적으로 보통 2개의 전제와 1개의 결론, 즉 3개의 언어적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가 누구나 아는 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전제의 일부(때로는 결론까지도)를 생략한 것을 생략삼단논법이라 한다. 말이나 글로 자기주장을 자연스러우면서도 설득력 있게 표현하려면 진부하거나 불필요한 전제들을 생략한 생략삼단논법을 되도록 자주 사용하는 것이 좋다.
대증식은 다음에 설명할 연쇄식과 함께 오히려 확장된 복합삼단논법이다. 이 논증법은 전제 하나하나마다 그것을 증명하는 증거를 붙임으로써 설득력을 강화하자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그 기본 구조는 전제1-전제1증거-전제2-전제2증거-결론 이렇게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만일 당신이 반박할 논리적 허점을 허락하지 않는 에세이, 보고서, 논술문 같은 글을 쓰고자 한다면, 연쇄삼단논법을 사용하라. 여기서 욕심을 내 더 강력한 연쇄삼단논법을 전개하길 바란다면, 전제들마다 증거들을 예로 첨부하는 연쇄대증식으로 만들어라. 여기서 짧고 강력한 매혹적인 표어나 광고문을 쓰려고 한다면, 연쇄삼단논증 내지 연쇄대증식을 만든 다음 불필요한 것들은 과감히 버리는 생략삼단논법을 함께 사용하라.
최고의 수사학 교본으로 인정받는 퀸틸리아누스는 수사학 교육 과정을 유년시절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3단계로 나누었다.
첫번째는 언어 학습단계다. 부모는 물론 아이를 돌보는 사람들이 결함이 있는 언어를 사용하면 안된다. 둘째는 문법학자와의 수업단계다. 문법은 문장론에 가깝다. 7세쯤 되면 시에 대한 수업을 듣고 높은 소리로 낭독해야 하며, 작문을 배워야 한다. 셋째는 수사학자와의 수업단계다. 퀸틸리아누스는 수사학 수업은 빨라도 14세경 사춘기가 시작할 즈음이라고 했다. 수업 내용은 크게 진술하기와 연설하기 두 가지로 나뉜다.
낭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수사학적으로 뛰어난 문장들을 소리 내어 낭송하고 가능하면 암기하라는 것이다. 수사학적으로 뛰어난 문장은 산문을 말한다. 시와 달리 논증적 수사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기가 그렇듯이 수사학적으로 뛰어난 연설문의 낭송과 암송은 무체나 기예를 그대로 복사하거나 모방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의 목적은 우리의 뇌 안에 정신적 문법을 구성하고, 그것이 만드는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하는 일이다. 이때 우리의 뇌는 작품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 안에 들어 있는 정신의 패턴을 모방한다. 그럼으로써 언어와 학문, 그리고 예술을 익히고 재창조한다.
맺음말
정보의 홍수에서 우리는 단순한 정보의 수집자 내지 수용자로 전락할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얽히고설킨 정보들을 연결하고 편집하여 새로운 콘텐츠를 창조하는 창조자가 될 것인지가 관건이다.
그들이 자기 머리에 든 뇌는 텅 비워둔 채 , 정보들, 서적들, 강의들, 영화들, 미술들, 음악들이 가득 찬 정보기기만을 들고 다닐까 걱정한다.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고 단지 검색엔진을 돌려 찾아낸 정보와 지식에 의존해 살지 않을까 우려한다.
정보와 지식은 어디서든 전송받을 수 있지만, 진실과 지혜는 아무 데서도 전송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개별적이고 미시적이며 합목적적인 정보와 지식은 검색할 수 있지만 보편적이고 거시적이며 합리적인 전망과 판단은 검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 진정 필요한 것은 매 순간, 현장에서 오직 자기 자신에 의해 드러나는 진실과 지혜이고, 우리 사회에 필히 요구되는 것은 보편적이고 거시적이며 합리적인 전망과 판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우리의 손에 든 뇌가 아니라, 오직 머리 안에 든 뇌에서만 생성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성이 요구되고 있다. 굳이 이성의 종말은 아니더라도 개조는 필수적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지적해온 폭력성 때문일 뿐만 아니라, 정보혁명이 이끄는 정보와 지식의 폭발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이성은 위험할 뿐 아니라 무능하다는 것이 이미 드러났다.
근대적 이성은 동일률과 모순율에 뿌리내리고 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이 이성을 개조하려고 한다면, 밖으로 드러난 획일성, 전체성, 주체성, 역사성을 다양한, 개별성, 타자성, 현재성으로 대치하려는 노력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단지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처방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다르게 인지하고, 다르게 판단하고, 다르게 행동하게 하는 새로운 사유방식이 필요하다. 나는 이 책에서 살펴본 생각의 도구들이 그 대안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은유, 워리, 문장, 수, 수사라는 생각의 도구들은 동일성이 아니라 유사성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적 이성이 동일성을 근거로 한 사유 방식이라면 logos가 상징하는 생각의 도구들은 유사성을 근거로 한 생각의 패턴이다.
동일성이란 유사성이 딱딱하고 날카롭게 경직된 특별한 형태다. 유사성은 어떤 것(A)과 다른 것(~A)의 경계에 서 있지만 그 둘을 구분하지 않고 조화롭게 융합한다. 유사성은 부드럽고 유연하고 포용적이다. 그만큼 유능하고 창조적이기도 하다.
언젠가 우리가 마침내 새로운 이성을 고안해낸다면, 그것은 유사성에 근거한 사유 방식이 되어야 하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류가 탄생시킨 모든 문명이 은유, 원리, 문장, 수, 수사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온갖 정보들은 손안에 들고 있는 뇌에 넣고 다니면된다. 그리고 머릿속에 든 뇌에는 손에 쥐어진 뇌속에 있는 정보들을 꺼내서 새로운 전망과 판단, 그리고 이에 합당한 지식을 만들어낼 생각의 도구들을 넣어가지고 다니면 된다. 본문에서 살펴본 은유, 원리, 문장, 수 ,수사 말이다. 이것들은 부드럽고 유연하고 포용적이고 설득적이다. 또 유능하고 창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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