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 에고(ego)는 보편적으로 뜻하는 바가 아닌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믿는 건강하지 못한 믿음' 이라 정의해서 사용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불편함이 느껴졌다. 내가 품고있던 열정을 평가절하하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믿었던 몇몇 생각과 상충되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책에 대한 반발심이 공존하는 묘한 느낌이다. 이 책을 단순하게 함축적으로 말하자면 절제와 겸손, 자기성찰이라 할 수 있다. 끊임없이 솟구치는 나란 존재를 인식하며 다스려야 한다고 말한다. 오래전 내가 깨달았던, 하지만 잊고 있었던 생각이기도 하다. 나란 존재를 내려놓고 지내다 보면 평화로워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아마 내면 깊숙히 남들에게 인정받고 남들보다 더 우월해 보이려는 기대 심리가 나를 압박 했었는데 그것이 사라지면서 찾아온 평화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이 말하는 것과 일치한다.
전보다 개개인이 대중속에 노출되기 쉬운 지금. 에고는 예전보다 더 활기치기 쉽다. 남들의 좋은 면만을 보고 성공적인 모습만을 보여 그 길들을 그대로 따라만 가면 나도 그들처럼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진리를 찾고 있다. 저자는 자기중심주의자들 중에서 몇몇은 성공했지만 그것은 일부일 뿐이며 대부분 실패한 사람들이 많다고 말한다.
이 책이 많이 불편하다면 에고에 강하게 이끌리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나를 드높이고 인정해줄 사람을 찾고 있는 것들. 이것들이 진정 나쁜 것일까.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들을 찾으며 삶의 위로를 받으려는 행동들 말이다. 이 책이 너무 가혹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저자는 성공에서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과정에서 느꼈던 불안과 고통들을 치유하고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나를 내려놓는 것은 정말 힘들다. 나의 주변 사람들 중에도 자신을 알아주고 떠받들어주길 바라는 눈빛을 읽을 수 있다.
열정이라는 엔진이 우리를 성공으로 데려다 준다고 강하게 믿었던 사람이라면 이 책에 심한 반감을 느낄 수 있다. 한 없이 우리를 평가절하하며 겸손하길 요구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드높이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다.
외부의 관심으로부터 나를 절제시키라 말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내가 하는 행동이 옳은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평가가 있어야 한다. 외부를 의식하지 않으면서 외부에서 배워야 하는 아이러니함이 존재한다. 외부의 좋은 평가는 멀리하된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가까이해서 정말 옳은지 나를 끊임없이 검증해야 한다는 것일까? 생각만해도 정말 숨막히는 삶이다.
이 책을 단숨에 다 읽고 들었던 생각은 답답함이다. 나로부터 벗어나지만 나에게 집중하는 것. 그것은 성인군자의 길로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책이 말하는 바와 같이 살긴 힘들어도 힘들 때면 이 책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는 정도가 좋을 것 같다. 그냥 웃고 싶다. 나에게 소중한 사람과 함께 이야기하며 소소하게 웃고 싶다. 이 책이 주는 갑갑함이 그런 소박한 웃음을 더 간절하게 바라게 만드는건 왜일까
저자가 말하는 이 책이 당신에게 주고자 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에고를 억누르는 데 도움이 되도자 한다.
성공했을 때 에고의 여러 유혹을 겸손과 규율로 대체할 수 있도록 한다.
실패라는 암초에 좌초되지 않도록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과 불굴의 인내심을 기른다.
그 누구(무엇)보다 더 잘해야 하고 보다 더 많아야 하고 또 보다 많이 인정 받아야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에고이다.
에고를 대체하는 덕목은 바위처럼 단단한 겸손함과 자신감이다.
자신의 재능을 정확히 평가할 줄 아는 능력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런 능력이 없으면 개선은 애초부터 불가능하고 그 능력을 온전히 유지하는 일도 쉽지 않다. 에고는 자기가 가진 재능이나 힘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부풀리면서 즐겁고 만족스러워 하기 때문이다.
에고에 휘둘려 자기가 하는 일에 감정적으로 몰입하면 이성적인 분별력을 잃어버리기가 무척 쉽다.
최소한의 것을 하면서 가능한 한 밖으로부터 많은 관심과 신뢰를 받으려고 하는데, 나는 바로 이런 측면을 에고라고 부른다.
중요한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중요한 일을 할 것인가? 존재와 행동,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목적이 무엇인가? 무엇을 하려고 존재하는가? 행동이 존재를 결정짓는 것이 아닌 행동이 존재를 결정짓게 하라.
(과거가 나를 규정하게 만들지 마라. 나를 정의하는 것은 지금의 행동이다.)
무엇인가를 배우는 학생의 신분이 발휘하는 힘은, 단지 배운다는 사실이나 그 기간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다. 그 힘은 자기의 에고와 야망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준다는 데에서 비롯된다. 선생이 자기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에고가 작동할 수 있는 상한선이 생긴다. 이때 학생은 선생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에고가 날뛰지 않으니 학생이 고개를 숙이는 것은 겉치레가 아닌 진심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보다 잘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배워야 할 것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 또한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자기는 이미 모든 학습 과정이 다 끝났고,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바람을 실제라고 착각하는 순간 당신은 원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고 당신의 실력은 뒷걸음질 친다.
위대한 선수가 되고자 하는 격투기 선수라면 자기보다 기량이 나은 사람과 자기가 가르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기량이 자기와 비슷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을 가능한 모든 각도에서 실질적이고도 지속적으로 평가받고 보완받아야 한다.
만약 당신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결코 그것을 배울 수 없다. 스스로 자신이 최고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절대 발전할 수 없다.
친구나 가족, 주위의 뛰어난 사람들이 당신에게 칭찬과 격려를 보낼수록 그런 냉정한 비판과 비평을 적극적으로 요청하고 얻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에고는 어떻게든 이런 반응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성공한 사람들의 열정에 대해서만 듣기 때문에 실패한 사람들도 그들과 똑같은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지나친 열정으로 부터 벗어날 때 좋은 의도를 가졌지만 실제로는 무능했던 예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당신은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도움으로써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돋는 것, 바로 이것이 캔버스 전략이다. 이 전략은 장기적인 효과를 위해서 단기적인 효과를 버리려는 노력이다. 모든 사람이 타인의 인정과 존경을 구할 때 당신은 그것들을 머릿속에서 아주 지워버려라. 다른 사람들이 칭찬받도록 내버려두면서 당신은 훗날 이자가 엄청나게 붙어서 되돌아올 때까지 계속 저축하기만 하면 된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칭찬과 존경을 받을 때 당신은 오롯이 즐거워할 수 있다. 이것을 당신의 목표로 삼아라.
누구라도 야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간에 내면에서 들려오는 말의 제물이 되기 쉽다. 특히 '개인의 브랜드화'를 강조하는 세상에서는 더욱 그렇다. 요즘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기 일과 재능을 남에게 팔기 위해서 온갖 이야기들을 해야만 하고, 그러다보면 현실과 허구를 가르는 경계가 어딘인지 조차도 잊어버리고 만다.
자만심은 근시안적이고 자위적인 집착을 만들어냄으로써 전체적인 그림, 현실적인 실체, 자기 주변의 실제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도록 가로 막는다.
자기가 자만심에 사로잡혀 있다고 느낄 때에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더 겸손한 사람이라면 볼 수 있을 텐데 내가 지금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네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마침내 너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신이 파괴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때 신은 그에게 유망한 인재라고 말한다. 자만심의 싹은 일찌감치 없애지 않으면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을 죽여버리고 만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겸손한지 알아내는 방법은 다른 사람들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또 그 사람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 입니다.
모든 사람에게서, 그리고 모든 사물과 상황으로부터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당신이 잘 모르는 주제의 책을 집어 들고 읽어라. 당신이 알지 못하는 사람과 자리를 함께 해라. 그때의 그 불편한 감정, 당신 내면 깊숙이 가정하고 있던 생각들이 도전받을 때 느끼는 방어적인 감정들에 의도적으로 당신을 노출시켜라.
선수들이 자기들만의 신화를 만들어내는 것을 그만두고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나서야 다시 예전처럼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세운 목표를 이뤘을 때 거기에 장엄한 대서사라는 것은 없다. 그와 같은 성공이 얼어났을 때 당신은 단지 우연히 저기에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독특한 잠재력과 생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 자신만이 자기의 인생을 평가하고 또 그 인생에 여러 조건을 논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며, 바깥의 기준에 도달하려고 기를 쓰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 때문에 자기의 중요한 가능성과 목적을 낭비해버린다.
당신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왜 하는 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분명히 대답할 수 있을 때까지 이 물음을 뚫어지게 보아라. 그 대답이 나올 때에야 비로소 무엇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 이해하게 된다. 그때에야 당신은 아니오 라고 말할 수 있고 또 당신에게 중요하지 않은, 어쩌면 현실에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어리석은 경주에서 몸을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헛된 신화가 있다. 대개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지만 자기에게는 없는 것을 가지기만 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믿음이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꿈과 그것을 위해 요구되는 일들, 노력을 추동하던 야망, 이런 것들은 처음에는 순수한 동기였지만 방치되는 순간 자만이 되고 당연한 권한으로 잘못 인식된다.
냉철함을 유지하고 탐욕과 집착을 삼가며, 언제나 겸손하고 늘 목적의식을 가지고 자기 주변의 더 큰 세상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이 그것만으로 충분할 때 당신은 그렇게 하면 된다. 이게 훨씬 낫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무언가를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할 때 그 자체만으로도 자존감과 자긍심이 충만해진다면, 그 결과의 좋고 나쁨에 관계없이 충분하다는 말이다.
어떤 것의 가치 유무를 외부적인 요소들이 결정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 결정은 언제나 우리 자신이 내려야 한다.(미치광이와 다를게 무엇인가? 타인의 판단을 듣지 않는다면)
좋지 않은 조짐이 있다면 이것과 직면해야 한다. 병을 발견했다면 치료해야 한다. 그런데 에고가 이것을 어렵게 만든다. 자기 삶에서 필요한 변화들을 유예하고 축소하고 또 이것을 정면으로 마주하기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게 훨씬 더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화는 비판에 귀를 기울이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설령 그 말들이 우리를 분노하게 하고 상처주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렇다. 그런 비판의 말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며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자기가 한 행동을 성찰해야 한다.
어떻게든 실패를 회피하려고 하는 사람은 실패에 내재되어 있는 가치를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자기만의 엄정한 기준으로 스스로를 판단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박수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보다 스포트라이트를 덜 쫓는다. 장기적인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단기적인 실패나 부진에 불안해하지 않는다.
에고는 우리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우리 안의 불필요한 부정적 감정을 자극하며 우리를 질식시칸다. 당신은 증오나 분노가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에고의 마음으로 성공을 열망하거나 찾지 마라. 에고 없이 성공하라. 실패를 만났을 때는 에고가 아니라 당신의 근원적 힘으로써 돌파하라.
부와 명예를 쌓아올리는 것이 인생의 성취가 될 수 있지만 다음 것들 역시 인상적인 성취이다. 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 것, 보다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 균형 감각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 또한 만족하는 사람이 되고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 자기중심적이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 혹은 나아가 이 모든 것을 동시에 이루면 더욱 좋은 일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누구든 간에 전문가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꾸준히 맡은 바를 완벽히 해나가는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 무시된다. 습관적으로 하는 생각들을 세련되게 다듬는 일, 파괴적인 충동을 억누르는 일 등은 어떤 고귀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도덕적으로 필요한 요소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고, 우리를 보다 더 앞으로 나아가게 도와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