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프래질

2018. 7. 23.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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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얻고자 하는 노력에 대해서 어떤 불편함과 피해를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이론에 대한 맹신과 합리주의로 무장하려는 지식인들을 의심해 본 적 있는가? 전자는 해 본 적 없지만 후자는 가슴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둘이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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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안티프래질은 프래질의 반대이다. 세상은 충격으로 부터 혜택을 얻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불확실성과 무작위성을 좋아한다. 사람들은 예측을 하고 리스크를 측정하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며 프래질한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이 더 쉽다고 한다. 이 구분을 통해서 우리는 무작위성과 불확실로 부터 혜택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위험을 예측할 수 있다고 믿지만 이런 믿음 사후합리화에 따른 착각이다. 사람들은 선형과 이분법으로 세상을 더 쉽게 바라보게 되지만 여기에는 많은 대가가 따른다. 과신하며 위험을 축소하고 과잉반응한다. 이러한 두려움과 질서에 대한 갈망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의 진리는 차단하게 된다. 질서를 추구하면 가짜 질서를 얻게되고 무작위성을 수용하면 질서와 세상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1장

프래질의 반대되는 개념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저자는 이에 안티프래질이라고 이름 붙여준다.

스트레스의 근원을 제거한다고 해서 무조건 좋을 수는 없으며 반대로 큰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복잡계에 따른 결과로 우리가 스트레스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실제로 복잡하게 엮여있는 다른 부분에서 이해관계를 발생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일례로 해롭다고 생각하는 해충을 없앤다면 해충을 먹고사는 동물들의 생태계에 영향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2장 과잉보상과 과잉반응 

안티프래질은 일종의 여분이며 이에 대한 보상은 항상 과도한 형태로 나타난다. 리스크 예측은 이전에 있었던 위험들로 예측하곤 하는데 이건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가 대비해야 할 리스크는 실제로 경험하지 못했던 방식과 규모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리스크를 줄일수록 빈도는 줄어들지만 한번 발생하면 규모(과잉반응)는 더욱 커진다.


3장 고양이와 세탁기

유기체와 무기체의 차이를 안티프래질의 특성의 유무로 구분하는데 유기체는 안티프래질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복잡계는 스트레스로 부터 성장하며 안티프래질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경제, 사회, 시장, 문화는 복잡계에 해당하고 따라서 스트레스로부터 성장하지만 이것들을 우리는 기계와 같이 다루려 한다. 세상을 복잡계와 단순계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복잡한 세상은 원인이라는 단어 자체가 미스테리하다. 포착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며 정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미디어에서 끊임없이 배출하는 어떤 현상에 대한 원인들을 대부분 무시해도 좋은 이유다.

스트레스는 정보다. 복잡계에서 스트레스를 제거하면 취약해진다. 실제로 경제에서는 균형을 취하려는 시도를 하는데 복잡계에서 이는 죽음을 의미한다. 근대에는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 까지 일정한 길을 따라서 살아가려 하는데 이 때 생기는 많은 문제들이 실제로 무작위성을 제거하고 우리를 기계처럼 다루려는 행위에서 발생한다.

혁신은 사라지고 점점 도태되고 있다. 우리는 결과론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을 깨닫기 어렵다.


4장

진화는 개별유기체와 집단 사이의 미묘한 긴장에서 발생한다. 개별유기체는 프래질하지만 집단은 안티프래질하다. 집단의 진화는 개별유기체의 희생을 통해서 진행된다. 다시말해 진화는 환경과 돌연변이의 무작위성에서 진행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집단은 혜택을 얻지만 개체는 손해를 보는 상황을 알 수 있다. 프래질 할 때 예측이 중요한 이유는 예측에서 벗어나면 손해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적인 것은 안티프래질하다. 우리는 자연을 통제할 수 없기에 어쨌든 현실은 안티프래질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측과 상관없이 혜택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개체의 작은 손해가 집단에 큰 이익이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전체 집단이 하나의 개체로 이루어져 있다면 전체 집단이 무너질 수 있다. 개체들이 더 작은 단위로 집단을 이루고 있을 때만 국지적 실패가 집단의 성공으로 귀결된다. 근대 경제와 같이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면 단 한번의 예외적인 일로 모든게 사라질 수 있다. 실패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규모를 작게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문제는 집단과 개체간의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것이다. 실패는 필연적으로 필요하다. 어떤 개체는 결국 실패하고 손해를 보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실패한 개체에 대해서 손실을 최소화 시키는 것이다.


2권

우리가 지나치게 안정을 추구할 때 가변성에 더 취약해지는 이유를 설명한다.


5장

규모가 바뀌면 속성이 바뀐다. 이 진실은 우리가 제대로 보지 못하는 진실이다. 우리는 선형적으로 사고하길 좋아하기 때문에 어떤 것이 기존보다 2배 증가했다면 단순히 속성도 2배 커질 것으로 선형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완전히 다른 속성이 생기거나 없어지며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규모가 작은 사회에서는 서로 잘 알게 된다. 무언가 잘못하면 수치심을 느끼고 책임감을 가진다. 하지만 규모가 큰 집단에서 다른 사람은 그저 추상적인 항목에 불과하다. 무언가 잘못해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근대의 공직자가 왜 감정과 연민 없이 그저 숫자, 도표, 통계, 이론에만 매몰되어 정책을 펼치는지 알 수 있다. 인간은 구체적이지 않은 대상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수천 명이 죽은 뉴스보다 옆에서 우는 아이에 더 관심이 간다. 전자는 통계지만 후자는 비극이다.

우리가 개입을 통해서 가변성을 제거하면 평상시에는 리스크가 자주 오지 않지만 한번 오게 되면 재앙에 가깝다. 리스크를 늦출수록 그 규모는 증폭된다. 피해 규모 역시 선형관계가 아니기에 규모를 정확히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데이터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리스크는 과거에 있지 않고 미래에 있다고 믿게 만들기 쉽지 않다.

책을 통해 배운 지식보다 어떻게 작동하는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6장

실제로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은 도움이 된다. 매일 6시에 집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몇 분 늦을 경우 우리는 걱정하게 된다. 하지만 도착 시간이 매일 몇 분씩 다르다면 10분 정도 늦었다고 해서 걱정하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예외에 더 관대해질 것이고 과민반응하지 않게 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경제의 안정도 좋지 않다. 약간의 예외가 일어나면 사람들은 혼란과 패닉을 경험 할 것이고 이런 결과는 어떻게 되는지 역사적으로 알 수 있다. 무작위성은 교착상태에 빠져있을 때도 도움이 된다.


7장

어설픈 개입 때문에 발생하는 피해를 설명한다. 사이비과학에 대한 믿음을 종교적 믿음으로 부터 대체하면서 생기는 문제들을 말한다. 의사들이 개입하며 생긴 손해가 이익을 넘을 때 이를 의원성 질환이라 한다. 의원성 질환이 특히 많이 나타나는 영역은 사회/경제와 영역과 우리 몸이다. 이론은 상당히 위험한 것이다. 우리는 이론 없이도 과학을 엄밀하게 연구할 수 있다. 현상학은 이론이 없이도 경험적으로 나타나는 규칙성을 관찰하는 분야를 말한다. 이론은 매우 프래질하다. 무수한 이론이 나타났다 사라져버리길 반복한다. 그러나 현상학은 계속 남아 있다. 저자는 현실 세계의 의사결정에서는 매우 프래질한 것, 리스크 분석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 했다. 우리는 사회과학에 나오는 이런 구조물들을 이론이라기보다 망상이라 불러야 한다.

개입이 꼭 필요할 땐 과소개입하게되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과도개입하는 경향이 있다. 생태계와 같은 영역에서는 신뢰할 수 있을 정도로 충실하게 개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기업이 일으키는 경제적 왜곡 현상이나 도덕적 해이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자는 것이다. 무엇을 통제해야 하는가? 대체로 규모, 집중, 속도를 제한하기 위한 개입은 블랙 스완 현상을 줄이는데 도움이 된다.

개입을 해야 보상을 하는 근대의 시스템은 문제가 있다. 무엇을 하지 않아서 영웅이 된 사례도 찾아 보기 힘들다. 우리는 발생하지 않은 현상에 대해서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는 경향이 있다. 꾸물거림이 만물로 하여금 스스로 보살피도록 내버려두면서 자신의 안티프래질을 행사하도록 하는 자연적인 방어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꾸물거림은 생태학적 혹은 자연주의적 지혜로서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사실 인간은 많은 정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 꾸물거림은 정보를 잘 걸러서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도록 해준다.

지나친 개입의 이면에는 신호와 잡음을 구분하지 못하는 개인적, 지적 무능함이 자리 잡고 있다.

데이터는 양이 많을 때 유해하며, 심지어 적당할 때도 그렇다. 데이터를 자주 볼수록 신호보다 잡음에 더 많이 노출된다. 잡음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작은 변화에는 관심을 갖지 않으며 큰 변화만 보는 것이다.


8장 예측, 근대의 산물

프래질한 것은 예측이 필요하다. 무언가를 대비해 여분을 보유했다면 예측할 필요가 없다. 미리 예상하지 못했던 것을 탓하지 말고 안티프래질 혹은 프래질을 파악하지 못했던 거을 탓해야 한다. 즉 왜 프래질해져서 이런 사전이 일어나도록 했는가를 물어야 한다. 기회주의자들은 카오스 이론, 복잡계 이론, 파국 이론, 프랙탈 이론 등을 가미한 더욱 복잡한 모델을 가지고 블랙 스완을 예측하는 일에 뛰어 들었다. 하지만 답은 간단하다. 단순한 것이 더 낫다. 안티프래질로 담론을 옮겨야 한다.


3권

예측이 필요하지 않은 세상. 안티프래질의 이해와 전략.


9장

전문가들의 예측은 믿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파산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예측은 불가능하지만 프래질과 안티프래질을 구분할 수 있다. 프래질의 반대편 서면 안티프래질해진다.


10장 세네카가 말하는 인생의 오르막과 내리막

의사결정에서는 지혜가 지식보다 실천적으로나 철학적으로 훨씬 더 중요하다. 세네카의 실천적 자세와는 달리 다른 철학자들은 이론에서 실천을 도출해낸다. 근대의 학자들도 대부분 같은 식이다.

성공은 비대칭성을 야기한다. 돈이 많다면 이제 얻을 것보다 잃을 것이 훨씬 더 많다. 따라서 프래질하다. 세네카는 재산이 우리에게 하강국면을 걱정하게 만들면서 우리가 의존할수록 형벌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재산은 항상 더 많아져야 하고 줄어들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상황에 의존하면서 일종의 노예 상태로 만든다. 이런 프래질에 맞서기 위해 세네카는 재산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위해서 수양을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자면, 스토아 철학은 감정을 제거하기보다 길들이는 쪽에 더 가깝다. 두려움을 침착함으로, 고통을 정보로, 실패를 시작으로, 소망을 실천으로 바꾸어 놓는 사람이 현대적 현인이다. 세네카는 운명을 지배했다. 좋은 것을 유지하고 나쁜 것은 버렸다. 하강국면을 중단시키고 상승국면을 유지했다. 상승국면과 하강국면이 비대칭적이다. 이것이 바로 순수한 형태의 안티프래질이다. 잃을 것이 없다면 얻을 것만 남았으므로 안티프래질하다.

안티프래질은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하고, 하강국면보다 상승국면에 더 많이 있으며, 바람직한 비대칭성을 띠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안티프래질은 우리의 마음에 달려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11장 록스타와 결혼하지 말라

안티프래질로 가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우선 상승국면에 접어드는 것보다 하강국면에서 빠져나오는 데 있다. 성공을 위한 생존이 성공보다 선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성공하려면 우선 살아남아야 한다.

바벨전략은 양극단의 조합을 추구하고 중간을 기피하는 생각을 나타낸다. 한쪽에서는 리스크를 극단적으로 혐오하고 다른 쪽 끝에서는 극단적으로 수용한다. 리스크에 대해 양극단이 아닌 중간 지점에서 대단히 온건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엄청난 측정 오차를 유발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잘못된 선택이다. 그러나 바벨 전략은 애초부터 하강국면의 리스크를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즉 파멸의 리스크를 제거하여 생존이라는 성공의 전제 조건을 달성한다)

바벨 전략의 본질은 생존이다.


4권 옵션의 특징, 기술, 안티프래질적 특성을 지닌 지능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안다고 착각하는 목적론적 오류에 빠진다. 합리적인 산책가는 여행가와 달리 일정을 지속적으로 수정하는 사람이다. 철저한 계획에 따라서 움직이는 여행가는 목적론적 오류에 빠져들 수 있다. 계획의 완벽함을 가정하고 자신을 수정 불가능한 프로그램에 가두어버린다. 반면, 산책가는 새로운 정보를 얻으면서 자신의 프로그램을 끊임없이 수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의할 점은 이러한 수정(기회주의, 편의주의)은 인생과 사업에서 대단히 중요하지만 사람이 관련된 문제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의 관계에서 기회주의적 행동은 불신을 낳아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편의주의는 옳은 곳에서 사용되어야 한다. 행동의 과정으로부터 전환 시킬 수 있는 능력을 옵션이라고 한다. 옵션의 특징 중 하나는 실패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실패 했을 때 그것으로부터 바람직한 결과를 확인하고 이를 활용할 줄 알면 옵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옵션은 실패로부터 파괴되지 않고 그것을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생존과 성장이 옵션의 본질이다.)


12장 탈레스의 달콤한 포도

탈레스는 비대칭성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구매자가 권한은 갖지만 의무는 갖지 않는 옵션이다. 옵션에 대해 너무 많은 돈을 지불했을 때만 손해를 보게 된다. 금융 옵션은 그것이 옵션인지 사람들이 알기 때문에 비싸다. 하지만 가장 흥미로운 옵션은 공짜이거나 최악의 경우라 하더라도 값이 싸다. 중요한 사실은 유리하게 작용하는 비대칭성을 띠는 옵션을 싸게 구매할 때는 모든 정보를 자세히 알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이런 특징은 싸게 구매한다는 사실을 훨씬 뛰어넘어 우리가 우위를 지닐 때에는 상황의 흐름을 자세히 알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우리가 옳았을 때 더 많은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에 자주 옳아야 할 필요가 없게 해준다. 다시 말해 옳음의 빈도는 중요하지 않다.

불확실성이 높아질수록 옵션의 가치는 커진다.

옵션의 한가지 특징은 평균적인 결과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일정 수준을 넘어가는 하강국면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바람직한 결과만 생각하면 된다. 옵션은 결과가 분산되어 있는 것을 좋아하고 평균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도록 해준다. 성공한 과학자의 수는 분포에서 평균이 아닌 꼬리 부분에 해당한다. 옵션이 나쁜 결과에는 관심이 없거나 작가들이 자기 작품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경제 성장은 아시아의 방식으로 평균을 올리는 데서가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하려는 꼬리 부분의 극소수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숫자를 늘리는 데서 나온다.

사건에 대한 지식과 사건으로부터의 이익은 서로 같은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옵션을 가지고 있으면 지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항상 옳아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가 발생했을 때 자신에게 해롭지 않도록 하고, 바람직한 결과가 발생했을 때에는 이를 인식할 줄 아는 지혜만 있으면 된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나오기 전에 미리 평가할 필요가 없고, 결과가 나온 후 평가하면 된다는 점이다.(진화가 단순히 옵션, 선택 필터, 무작위성의 조합 덕분에 지식이나 지능이 없이도 놀랄 만큼 정교한 대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손실은 작지만 커다란 이익을 주는 시행착오를 팅커링이라고 부르자. 볼록성은 이런 정의 비대칭성을 의미한다.

옵션 = 비대칭성 + 합리성

여기서 합리성은 이익을 얻기 위해 좋은 것을 유지하고 나쁜 것은 버린다는 의미다.

옵션이 지식을 대체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가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우리가 이해했다고 주장하는 지식이 아니라, 주로 탈레스에 의해 그리고 자연에 의해 잘 사용되는 옵션에서 나온다는 대담한 추론을 하게 된다. 부의 결과로 교육이 나왔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교육의 결과로 부가 창출된다고 생각하거나 지적인 행위와 발견이 지적인 아이디어의 결과라고 잘못 생각한다면,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부정적인 결과.

(사람들이 교육의 초기부터 잘못된 방향으로 생각하도록 교육 받았기 때문에 이를 먼 훗날에 수정하기란 대단히 힘들 것이다. 너무 지능적이기에 지식에 매몰된 사람들의 이야기같기도 하다.)


13장 새에게 날아가는 법을 가르치다

미래를 전망하지 않고 과거를 돌이켜보면 기술은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인간은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무엇이 중요한지 잘 모른다. 결국 무작위성을 활용하여 발견한 것을 하나하나 배운다. 이것이 바로 안티프래질이 필요한 이유다.

발견과 실행의 과정을 통해 진화가 이루어진다. 진화는 생각보다 훨씬 더 우연한 변화에 의해 이루어진다. 무작위성은 발견과 실행이라는 두 단계에서 역할을 수행한다. 발견했다고 해서 반드시 실행되지는 않는다.

(발견+우연+행운)  + (실행+우연+행운) => 진화

정부와 대학은 혁신과 발견을 위해 하는 일이 별로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의 눈을 어둡게 만드는 합리주의뿐만 아니라, 그들은 복잡한 것, 화려한 것, 뉴스거리가 되는 것,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 과학적인 것, 웅장한 것을 찾으려고 하지 여행용 가방의 바퀴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단순한 것에는 월계관을 얹어주지 않는다.

시행착오의 비대칭성을 통해서 안티프래질이 지능을 대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지능은 필요하다.

합리성에 관한 설명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이 이전에 가졌던 것보다 더 낫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능력이라는 점을 알았다. 다시 말하면 옵션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옵션의 행사는 전보다 더 나은 가치가 있는 대안을 받아들여 이익을 취한다는 의미로, 바로 여기서 합리성이 요구된다.

기술의 역사를 보면 안티프래질로부터 얻은 옵션을 사용하는 능력은 매우 떨어진다. 바퀴의 발견과 바퀴의 사용하는 것 사이의 격차를 보았다. 연구자들은 이런 지연을 중개 격차라고 한다. 발견에서 첫 번째 실행까지의 시차를 의미한다. 이런 시차는 지나친 잡음과 학문적 이해관계 때문에 나타나며, 근대에 와서는 더욱 길어지고 있다.

어설픈 합리주의 갖는 오류는 학문적 지식의 역할과 필요성을 과대평가하도록 만들고 체계화할 수 없는 것, 더욱 복잡한 것, 직관적인 것,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을 과소평가하게 만든다. 실제로 사람은 안티프래질한 행위를 통해 얻거나 우리에게 내재된 생물학적 본능을 통해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지식과 사상을 책과 이성을 매개로 얻는다고 쉽게 믿고 눈이 멀게 된다.(지식은 불과 같이 조심히 그리고 위험 요소로써 바라보며 다뤄야 한다. 불은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유용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조심히, 그리고 위험을 다스리는 안전장치가 있을 때만이 그렇다. 지식에 대한 우리의 환상은 불은 언제나 우리에게 유용하기만 할 것이라는 생각과 같다.)

새는 우리의 공기역학 이론 없이도 날 수 있다. 우리는 물리역학을 이해하지 않고도 자전거를 탈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상을 바꾸면 이해하지 못한다. 마치 우리가 어떤 이론 때문에 무엇을 더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 생각은 영역의존성 때문에 발생한다. 기여에 관한 잘못된 환상은 주로 확증의 오류에서 비롯된다. 역사는 승자가 되었든 패자가 되었든 간에 그것을 기록할 수 있는 사람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슬픈 사실과 함께 두번째 오류가 나타나는데 바로 확증의 오류다. 이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이 확증적인 사실(얻어낸 사실)을 전달해줄 수 있지만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실패했는가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은 전달해주지 못한다. 유도된 연구는 연구비로부터 무엇을 얻었는지 말해주지만, 무엇을 실패했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무작위적인 결과보다 훨씬 나은 결과를 얻었다는 인상을 준다.

우리는 부유한 선진국의 높은 학문적 연구 수준을 보면서 아무런 비판없이 연구가 부를 창출한다고 생각해버린다. A와 B는 서로 연관이 없거나 인과관계가 실제로 반대일 수도 있음을 생각하지 못한다. 특히 뉴스가 주도하는 문화에 빠져들 때 다른 부수 현상에 쉽게 빠져든다. 또한 이런 부수 현상이 어떤 행위를 유도하고, 이런 행위를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사람은 정교해 보이는 것에 잘 속는다. 기관에서 추진하는 연구를 보면, 연구자들은 자신의 논리를 확증하는 사실을 선별적으로 보고하면서, 이를 반박하거나 이 논리에 적용되지 않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는다. 과학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인식에는 상당히 개념화되고 뚜렷하고 정화된 하버드 방식의 필요성을 믿게 만드는 편향이 내재되어 있다. 통계적 연구는 이런 편향으로 훼손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확증적인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것을 더욱 믿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로 작용한다.

좋은 것만 골라서 취할 수 있는 체리 피킹은 옵션의 특성을 갖는다. 현실 세계는 안티프래질적 특성을 지닌 지능에 의존한다. 그러나 대학은 이런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개입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개입 없으면 더 좋아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14장 두 가지가 서로 같은 대상이 아닐 때

국가의 교육 수준을 높인다고 해서 소득 수준이 높아진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반대, 즉 소득 수준이 교육 수준을 높인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있으며, 이는 착시 현상이 아니다.

개인에게 교육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교육은 직업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신용장 역할을 한다. 그러나 국가 단위로 생각했을 때 이런 효과는 사라진다. 대학의 역할이 지나치게 과장되고, 피상적인 생각에 의존해 설정한 잘못된 인과관계에 잘 속아 넘어가는 우리들의 성향을 대학들이 이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생목을 취급해 크게 성공한 트레이더는 생목을 초록색 칠을 한 목재로 생각했었다. 실제로 생목은 건조하기 전에 갓 베어낸 목재를 의미한다.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고, 다루기도, 설명하기도 쉽지 않은 다른 무엇인가를 꼭 필요한 지식이라고 잘못 이해하는 상황을 생목의 오류라고 부르자.

마음속으로 복잡한 계산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가장 기본적인 것을 놓친다. 따라서 단순한 것이 더 낫다는 원칙이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많이 연구할수록, 명백하고 기본적인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반면, 행동은 대상을 가장 단순한 모델로 옮겨 놓는다.

무엇인가(인식, 아이디어, 이론)이 있고 이런 무엇인가의 작용(가격, 현실, 현실적인 것)이 있다. 이때 통합의 문제는 이런 무엇인가의 작용은 다른 특징을 갖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나타난다. 무엇인가와 무엇인가의 작용 간의 비대칭성이 커질수록 둘 사이의 차이도 더욱 커진다. 결국 이들은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된다.

옵션은 불확실성을 길들이고, 미래를 이해하지 않고서도 합리적으로 행동하도록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반면, 화술에 의존하는 것은 정확하게 그 반대다. 안타깝게도 불확실성에 의해 길들여지고 좌절하게 만든다. 단순히 과거에 비추어 미래를 바라보려고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지식을 두 유형으로 나누었다. 하나는 정규 교육에서 얻는 지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시행착오, 하강국면이 별로 없는 리스크 수용, 바벨 스타일의 탈지식화된 형태의 리스크 수용에 내재된 안티프래질의 특징을 갖춘 뚱보 토니 스타일의 지식이었다. 불투명한 세상에서는 두 번째 것만이 유용한 지식이다. 두번째 지식이 화술에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며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15장 패자가 쓰는 역사

행동가는 글을 쓰지 않는다. 행동할 뿐이다. 새들은 날아가고, 새들에게 날아가는 법을 가르쳤던 사람들이 새들의 이야기를 쓴다. 따라서 역사는 시간이 있고 학자로서 보호받는 자리에 있는 패자들이 기록한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지식의 형성 과정에서 행동에서 이론이 아닌 이론에서 행동을 추출하듯이 순서가 뒤바뀌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이론에 비해 실험은 사람들이 훨씬 더 주의 깊게 관찰하도록 만든다. 수학이 갖는 명백한 부작용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낙관하고 지름길을 찾도록 만들어 프래질을 초래한다는 사실이다.

산업혁명과 의약 분야에서 인과적 환상을 들추어 내고 과학의 역할이 과대평가되지 않았는지 살펴보겠다. 

제도권 과학은 그 안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면 빼먹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일부 과학자들이 먼저 발견한 사람의 업적을 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도 생기면서, 애호가와 행동가들의 업적은 실제 기여한 것에 비해 상당히 과소평가되었을 것이다. 목적론적 연구가 아닌 비목적론적 팅커링에 연구가 지원되어야 한다.(인터넷처럼 혁신을 가져다 줄 기술은 이미 발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단지 혁신적인 형태로 실행되지 못하고 있을 뿐) 투자에서 시행횟수는 높이고 개별 투자 금액을 낮추어 모든 옵션을 가지고 있는 편이 좋다. 극단의 왕국에서는 옵션이 많으면 많을수록 유리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영역에서는 지식 혹은 지식이라 불리우는 것은 연구를 방해한다.

기업들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긴 하지만 전략 계획이 유용하다는 증거는 없다.

증거의 부재가 부재의 증거는 아니다. 이는 다음과 같다. 안티프래질한 사람에게 좋은 소식은 과거의 데이터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프래질한 사람에게 나쁜 소식은 쉽게 눈에 띠지 않는다.

안티프래질한 경우 표본은 장기 평균을 과소 추정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단점이 아닌 장점을 숨긴다. 프래질한 경우 표본은 장기 평균을 과소 추정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단점을 숨기고 장점을 과시한다. 

간단한 원칙을 갖고 있다. 하버드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택시 운전기사나 케케묵은 통계적 추론에 무지한 사람보다 사물의 이치를 훨씬 더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원칙 말이다.

돌팔이 의사empirick은 경험주의자라는 단어 empiric 은 대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실험과 경험에 의지하는 사람을 일컬었다.그리고 이런 시행착오와 팅커링은 직업적으로나 사회적 지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치부되었다.그리고 지금까지도 상당히 지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정규학문은 이른바 협잡꾼들의 지식에 비해 더 낫다고 볼 수도 없었다. 정규 학문은 자신의 기만을 합리주의가 가진 영향력의 뒤편에 숨기고 있었다.


16장 무질서가 주는 교훈

게임은 영역 특수성을 갖는다. 삶을 위한 훈련을 제공해주지도 않고, 게임 이외의 영역에 적용했을 때에는 심각한 오류를 저지르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교훈을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에 적용하기 어렵다는 사실, 즉 학교에서 배운 지식은 주로 학교에서만 머물게 된다는 불편한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지금도 전문 분야에서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것은 반드시 원론적인 내용을 벗어나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엇을 읽어야 할 것인지 정할 때에는 자신이 정해 놓은 방향을 따라야 하고, 바로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다. 학교에서 가르쳐 준 것은 잊어버려도 내가 스스로 읽으려고 했던 것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17장 뚱보 토니, 스코라테스와 맞짱 뜨다

소크라테스가 추구했던 것은 그 대상의 본질적인 성질에 관한 정의였다. 이처럼 정의된 지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생각은 플라톤이 사물의 정의에 관해 자세히 서술해 놓은 형상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그의 주장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

니체의 '나한테 난해한 주장이라고 해서 반드시 우둔한 주장은 아니다'라는 진술은 어쩌면 니체가 살던 세기에서 가장 강력한 진술인지 모른다. 니체는 주로 이해 증진에 목표를 둔 소크라테스식 진리를 몹시 싫어했다. 지식이 만병통치약이고 오류는 악이며, 따라서 과학은 낙관주의적 활동이라는 주장을 향해 비난을 퍼부었다. 니체는 두 가지 힘을 보았다. 하나는 아폴로의 힘이고 다른 하나는 디오니소스의 힘이다. 아폴로의 힘은 이성과 극기를 바탕으로 질서, 균형, 합리성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이다. 디오니소스의 힘은 우리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이해하기 힘들고 본능적이고 길들여지지 않은 힘이다. 아폴로의 힘이 커지면서 합리주의의 영향력이 커지고 이는 둘 사이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디오니소스가 없이는 지식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과 이것은 확률적 팅커링의 원천이 될 수 있고 아폴로의 힘이 선택 과정에서 합리성의 한 부분을 차지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으로부터 나오는 합리적지식에 기반을 둔 철학을 공격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교과서에는 등장하지 않거나 아주 드물게 언급되곤 했다. 그들은 왜 잊혀졌는가? 제도권 교육이 어설픈 합리주의에 따른 질의 저하와 단순화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에르네스트 르낭은 아베로에스를 공격하면서, 논리학은 개념을 정의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미묘한 차이를 제거해버린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리고 진리는 미묘한 차이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논리학은 윤릭학이나 정치학에서 진리를 찾을 때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도구라고 했다.

그리스의 역사가 플루타르크는 소크라테스는 관습을 파괴하고 시민들에게 법과 질서에 반대하도록 유혹하면서 자신이 국가의 참주가 되려고 했던, 말만 앞서는 사람이다. 라고 말했다. 고대 사람들은 어설픈 합리주의를 사고 능력을 향상시키기는 커녕 떨어뜨렸고 궁극적으로는 프래질을 초래한다고 생각했다.


속아넘어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인생의 차이는 참과 거짓에 있지 않다. 오히려 속아 넘어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 사이에 있다. 교과서가 주는 지식은 보상의 숨은 비대칭성을 못 보게 한다. 바로 평균의 개념이 그렇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보상, 즉 행위로부터 얻는 혜택이나 손실이 얼마나 큰가에 있다.(기댓값)

중요한 것은 확률이 아니라 프래질이다. 우리는 주로 확률이 아니라 프래질을 생각하면서 결정한다. 혹은 달리 표현하면, 주로 참과 거짓이 아니라 프래질을 생각하면서 결정한다. 참과 거짓은 높은 확률과 낮은 확률에 상응하는 표현이다. 우리가 설문조사에서 95%의 신뢰 수준에서 얻은 결과라고 하면 5%의 리스크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5% 리스크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행기가 95% 신뢰 수준에서 안전하다고 말하면 어떨까? 99% 신뢰수준이라고 해도 우리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1% 리스크가 우리에게 미치는 효과를 크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실 세계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은 보상이지 확률(참과 거짓)이 아니다. 도박장이 아니라면 우리는 확률을 계산할 필요가 없으며 보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생목의 오류를 생각나게 한다. 블랙 스완에 해당되는 사건과 이런 사건이 미치는 영향이 규모는 서로 같은 대상이 아니다.

확률 != 보상

사건 != 사건에 따른 영향

하지만 그 둘을 같은 대상으로 보는 오류는 일반적인 반응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이론에만 매몰된 주장을 들을 때는 종교적인 것 혹은 전통적인 경험에 바탕을 둔 지식이 이처럼 어설픈 위조 과학보다 훨씬 낫다.


5권 비선형성


18장 바윗덩어리 1개와 작은 돌멩이 1000개의 차이

프래질한 대상은 충격의 강도가 증가하면서 손상은 더 많이 증가한다.(선형적으로 증가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손상은 예상하기 힘들 정도로 커진다)

프래질한 대상은 작은 충격에 부서지지 않고 비선형성 효과의 지배를 받는다. 그리고 커다란 충격(고속에서 비롯되는)이 작은 충격(저속에서 비롯되는 충격)에 비해 드물게 나타나기 때문에 극단적이고 드물게 일어나는 사건의 지배를 받는다. 작은 충격의 누적 효과는 이에 상응하는 단 한 번의 충격이 지닌 효과보다 더 작다. 이는 프래질한 대상이 중간 정도의 일련의 사건보다 극단적인 사건에 의해 훨씬 더 큰 손상을 받는다는 원칙을 의미한다. 안티프래질한 대상의 경우, 충격의 강도가(일정 정도까지) 증가하면서 더 많은 혜택(혹은 손상의 감소)을 얻는다.(우리 몸으로 웨이트 운동을 할 때를 생각해보라)

교통량을 예상해 도로를 만든다고 생각해보자. 정책입안자들은 예상되는 평균 교통량을 산출하여 도로를 만들 것이다. 만약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2배 많은 차량이 나타나면 교통비용이 2배만큼 늘어나지 않고 훨씬 초과하게 된다. 이것은 비선형성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교통비용이 자동차 평균 대수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시스템의 효율성과 최적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비선형 반응을 잘못 이해한 데서(혹은 아예 모르거나) 비롯되는 문제다.

선택에 있어서 다른 대안은 없으며 오로지 하나를 선택해야만 할 때. 그리고 그 선택이 비용과는 상관없이 해야만 하는 경우 그 상황을 짜내기를 해야 할 때이다. 짜내기는 규모가 커지면서 더욱 나쁜 영향을 미친다. 규모가 큰 것은 실수, 특히 터무니없는 짜내기에 취약하다. 규모가 커지면서 짜내기 때문에 들어가는 비용은 비선형성을 띤다. 따라서 어려운 시절에는 규모를 키우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규모로부터 얻는 이익은 눈에 잘 띄지만 리스크는 숨어 있다. 그리고 이처럼 숨은 리스크가 기업에 프래질을 초래한다. 바윗덩어리와 작은 돌멩이들의 차이를 항상 기억해야 한다. 프로젝트도 큰 규모의 프로젝트일 경우 지연 비용이 증가하는 경우가 많다. 프로젝트 규모를 줄이고 단위 프로젝트로 작게 유지할 경우 많은 부분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실패의 확률을 고려하지 않으면서 효과만 계산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병목 현상은 모든 짜내기 주범이다.

시스템의 무작위적인 요소를 과소 추정하는 데에는 심리적인 바이어스가 있지만 이것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증가하면서 불확실성은 더욱 커진다. 근대에는 전보다 더욱 복잡한 비선형 경제와 가깝다.

블랙스완 효과는 복잡성, 구성 요소 간의 상호의존성, 세계화, 그리고 사람들이 아슬아슬한 모험을 하게 만드는 효율성이라는 끔찍한 유혹 때문에 더욱 커지게 되어 있다. 어딘가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프로젝트 전체가 마비될 수 있다. 따라서 프로젝트는 가장 약한 연결 부위만큼 약해진다. 이제 세계는 더욱더 예측할 수 없는 곳이 되어가고 있고, 우리는 예측은 고사하고 오류가 많은 기술, 추정하기 어려운 상호 작용에 더욱더 의지하고 있다.

계획 오류는 본질적으로 프로젝트가 갖는 비선형성에 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세계화가 갖는 프래질 효과를 세상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는 현상 탓으로 돌릴 수 있다. 경제 변수를 훨씬 더 심하게 변동하게 만들면서 세계를 극단의 왕국으로 몰아가고 있기 떄문이다. 또 다른 원인도 작용한다. 부는 비선형성을 띠기 때문에 세계를 점점 더 달라지게 만든다. 우리는 단순히 부유해짐으로써 심각한 잘못을 저지른다.

프래질은 비선형성에서 비롯된다. 비선형성에서 피해를 보면 프래질하며 이익을 얻으면 안티프래질하다고 할 수 있다.


19장 철학자의 돌과 그 반대

안티프래질한 오차는 양방향으로 작동한다. 이익 혹은 손해를 볼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런 긍정적 오차는 규모를 작게 만들고 시간이 지나면 상쇄된다. 하지만 프래질한 오차인  부정적 오차는 일방적으로 손해만 보게 만든다. 이런 일방적인 효과는 우리가 오차로부터 얻는 이익보다 손실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무작위성과 손실을 과소 추정하게 만든다. 실제로 가정의 작은 변화가 확률을 엄청나게 끌어올리기 때문에 작은 확률은 오차에 상당히 프래질하다. 잘못된 계산과 그로부터 발생한 위험의 과소 추정은 오차가 어마어마하게 심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우리가 어떤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와 동일한 상황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인지하는 방법은 추정한 오차를 작게 변화시키고 그 효과가 얼마나 큰지 그리고 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된다. 즉 추정 오차를 점진적으로 변화시켜 비선형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지 관찰하면 된다.

비선형성을 띠는 상황에서는 평균, 즉 1계 효과는 중요하지 않다. 반응이 비선형성을 더욱 많이 가질수록 평균은 더욱 의미가 없는 정보가 되고 평균 주변에서의 불변성이 더 큰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 평균에서 벗어났을 경우 큰 변화를 일으킨다.

우리는 비선형성을 띠는 상황에서 X함수의 움직임(결과)은 변수 X의 움직임(변수 그 자체)과 서로 같은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할머니가 살기 적정한 온도인 평균 20도는 변수에 해당하는 온도의 평균을 나타낸다. f{(-15 + 55)/2} 

이 공식이 들어맞는 세상에서는 온도를 20도로 항상 맞춰 놓고 살면 된다. 즉 변화를 없애야 한다. 다시 말해 프래질해도 문제없이 살 수 있다.

각 온도의 결과에 대한 평균은 다음과 같다. {f(-15) + f(55)}/2 할머니는 영하 15도에서 돌아가셨고 영상 55에서도 돌아가셨다. 결과에 대한 평균도 돌아가셨음을 나타낸다. 이런 세상에서는 영하 15도인 강추위와 영상 55도의 폭염에 대비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즉 변화에 대응하도록 살아야 하는 안티프래질한 상황이다.

선형 보상을 받는 사람은 50% 이상으로 정확하게 맞추어야 한다. 볼록성을 띠는 보상을 받는 사람은 훨씬 덜 정확하게 맞추어도 된다. 안티프래질의 숨은 혜택은 당신이 무작위적일 때보다 덜 정확하게 맞추어도 여전히 훌륭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해준다는데 있다. 여기에 바로 옵션의 힘이 작용한다.

프래질의 숨은 폐해는 잘못 예측했을 때 오는 피해를 상쇄하기 위해서 당신이 무작위적일 때보다 예측을 훨씬 더 잘해야 하고,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더 잘 알아야 한다는 데 있다.

우리에게 유리한 비대칭성 혹은 정의 볼록성 옵션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를 잘 활용한다면, 장기적으로 불확실성 속에서 평균보다 더 잘할 수 있다.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옵션은 더욱 큰 효력을 발휘하고, 당신은 더 나은 성과를 내게 된다.


6권 비아 네가티바

비아 네가티바는 무엇이 신이 아닌지를 나열하고 제거 과정을 거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그리스 정교회의 신학적 전통에 따라 직접적인 표현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다. 여기서 바벨 전략의 논리에서는 먼저 프래질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수완이 있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이 아닌 수완이 없는 사람이 실패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부정의 측면에서 더 예상을 잘 할 수가 있다. 지식을 위한 가장 위대하고 강건한 기여는 우리가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을 제거하는 데 있다. 이를 제거적 인식론이라 부르자. 인식론의 중심 기조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옳은 것이 아니라 틀린 것에서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혹은 이를 프래질과 강건함을 구분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면, 부정적 지식(틀린 것, 유효하게 작용하지 않는 것)은 긍정적 지식(올은 것, 유효하게 작용하는 것)에 비해 오류에 더욱 강건하다. 따라서 지식은 추가가 아니라 제거에 의해 더욱 발전한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이 틀린 것으로 판명될 수 있지만, 우리가 틀린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 옳을 수 없거나 최소한 쉽게 옳을 수 없다면 말이다. 부정적 지식은 더욱 강건하다. 그러나 완벽하지는 않다. 오류 입증이 항상 분명한 것은 아니다. 분석 도구의 오류, 불운, 과학자들의 기만이 오류 입증의 증거와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아 네가티바의 또 다른 응용은 단순한 것이 더 낫다는 생각에 있다.(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은 위험하지만 단순한 것 자체는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입장이다) 먼저 극단의 왕국에서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간에 아주 드문 사건이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고 리스크에 노출된 많은 것들을 변화시키지만,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처럼 아주 드문 사건을 활용하거나 예방하는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물리학처럼 믿음이 가는 분야는 통계적 방법을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반면 정치학이나 경제학처럼 주목할 만한 것들을 결코 만들어낸적이 없는 분야는 정교한 통계적 방법과 증거로 가득 차 있다. 과학에서 이런 상황은 가장 많은 알리바이를 가진 사람이 범인으로 밝혀지는 탐정 소설과 비슷하다. 블랙 스완과 같은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의 통계분석이 무효임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


20장 시간과 프래질

안티프래질은 처음 갖게 되는 직관과 달리 옛 것이 새 것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혁신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은 미학적으로 불쾌감을 조성할 뿐만 아니라 경험적으로나 철학적으로도 말이 되지 않는다. 상상은 현재의 세계에 무엇인가를 보탤 가능성이 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이번 장에서 나는 이것이 정확히 퇴보하는 접근 방식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것이다. 보다 엄격한 접근방식은 안티프래질과 프래질의 개념에 따라 미래에 속하지 않는 것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바로 비아 네가티브를 의미한다. 프래질한 것은 결국 부서지게 되어 있다.

이제 나는 비아 네가티바 방법이 예측 중 유일하게 타당한 것이라고 주장을 하겠다. 가장 프래질한 것은 예측이 가능한 것, 즉 예측 가능성에 기반을 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다시 말하면, 블랙 스완을 과소평가하는 사람은 결국 집단에서 퇴출될 것이다. 안티프래질한 성질을 가지는 장기 예측은 더욱 신뢰도가 높다.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사람은 최근의 것을 좋아하는 불치의 네오매니어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미래를 상상해보라는 주문을 받으면 현재를 기준으로 하여 여기에 새로운 기술과 제품, 무엇인가를 더하는 방식으로 과거의 발전의 연장선에서 이론적으로 숙명이라 여겨질 만한 것을 이끌어 내려는 경향이 있다. 결국 미래에는 우리들의 소망이 담겨 있다. 따라서 우리는 미래를 지나치게 기술화하고 앞으로 1000년 동안 우리가 마주하게 될, 여행용 가방의 작은 바퀴와 같은 기술의 위력을 과소평가한다.

문학적 소양의 결여는 역사적 소양의 결여, 맹목적인 네오매니어의 탄생과 연관되기 때문에 실제로 미래에 대한 맹목적인 자세로 이어진다. 과거가 현재보다 미래의 특징을 훨씬 더 잘 가르쳐준다. 미래를 알려면, 당신은 킬러 애플리케이션에만 몰두하면서 기술자폐적인 용어와 씨름할 필요가 없다. 오직 다음과 같은 원칙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과거를 존중하고, 역사적 기록에 관심을 가지고, 옛 것이 주는 지혜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생존에는 필수적이지만 때로는 문자로 전해지지 않는 경험법칙을 알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주변에 있는것, 즉 살아남은 것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

기술을 자기 제거를 통해 나쁜 기술의 영향을 없앨 수 있다. 기술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때 가장 좋은 상태가 된다.

이제 나는 소멸하는 대상과 소멸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 리디효과에 근거해 다음과 가은 제안을 하려 한다. 소멸하는 대상의 경우, 앞으로 살아가는 날들은 남아 있는 수명을 단축시킨다. 반면 소멸하지 않은 대상의 경우, 앞으로 살아가는 날들은 남아 있는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다. 따라서 오래된 기술일수록 앞으로 오랫동안 남아 있게 되리라는 기대를 할 수 있다. 나는 모든 기술이 노화되지 않는다고 말하지는 앟겠다. 노화되기 쉬운 기술은 이미 사라지고 있다. 젊게 살려면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믿음이다. 이는 논리적 오류와 함께 정신적 편향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진보는 젊은 사람에게서 나온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존의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롭고, 일상에 찌든 나이든 사람들이 잃어버린 용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은 사람이 프래질한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이유는, 젊어서가 아니라 가장 미숙한 아이디어가 프래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론 미래의 아이디어를 파는 사람은 과거의 가치를 팔아서는 큰돈을 벌어들일 수 없다. 그래서 새로운 기술은 과장되기 쉽다.

기술을 과신하게 만드는 또 다른 편향은 우리가 정지가 아닌 변화를 주목하는 데서 나온다.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서 커다란 역할을 하는 것보다 변하는 것에 더 많이 주목한다.

사람들은 기술적으로 계속 업그레이드되는 제품에 대해서는 공통점보다 차이를 먼저 본다. 더 새로운 버전이 나오는 순간 참신함을 잃어버리고 새 것을 사게 만드는 자극을 트레드밀 효과라고 부른다. 알다시피 이런 효과는 앞에서 말한 대로 우리 인간이 변화에 주목하도록 만드는 바이어스에서 비롯된다. 즉 우리는 어떤 제품에 대해 차이를 인식하면서 불만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찾지만 금방 익숙해지고 또 다시 새로운 것을 찾게 된다. 그러나 고전 작품이나 클래식 가구처럼 기술과 무관한 영역에서는 기술에 불만을 갖게 만드는 트레드밀 효과를 찾아볼 수 없다.

인간은 기술적 영역과 실제 영역에서 제품을 인식할 때 이상한 모순을 나타낸다. 전자책 단말기를 홍보할 때 종이 책과 얼마나 유사한지를 나타낸다. 같은 한국 사람이지만 지역적으로 다른 사람을 만나면 차이에 더 집중한다. 하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을 만나면 차이보다는 공통점에 더 집중한다. 첫눈에 비슷해 보이는 존재에서는 차이를 찾고 첫눈에 전혀 달라 보이는 존재에 대해서는 공통점을 찾는다.

이제 우리는 프래질과 강건함의 기준을 정보를 다루는 데 적용할 수 있다. 여기서 프래질은 시간의 테스트를 견뎌내지 못하는 기술과도 같다. 따라서 책과 과학 논문의 나이를 고려해보면 최적의 경험법칙을 알 수 있다. 1년을 버틴 책은 아무리 과대광고를 하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더라도 살아남기에 충분한 품질을 가질 가능성이 아주 낮으므로 대체로 읽을 만한 가치가 없다. 수십 만 편의 논문들이 엄청난 결과를 가진 것처럼 발표되지만 결국은 소음에 불과하다. 소음이 아닌 획기적인 발전인가의 문제는 그 안에 담긴 아이디어의 모든 측면을 살펴보아야 알 수 있으며 여기에는 오직 시간만이 해결할 수 있는 불투명성이 항상 내재되어 있다.

무엇이 프래질한 것인가? 큰 것, 최적화된 것, 기술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 오랜 세월 동안 검증된 경험 법칙이 아니라 이른바 과학적 방법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장점으로 여겨졌던 규모가 결국에는 블랙 스완에 지나치게 프래질하도록 만들어 대기업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도시 규모의 국가와 소규모 기업은 계속 남게 될 것이며, 심지어 번성할 수도 있다. 국민국가, 화폐를 찍는 중앙은행, 경제학 교육기관은 명목상으로는 남아 있겠지만 그들의 권위는 심각하게 손상될 것이다. 기존에 프래질한 것들은 사라지고 다른 프래질한 것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

리스크 관리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과거에 자신들을 괴롭혔던 위험한 사건만을 고민한다. 그러나 그들을 심각하게 괴롭혔던 사건이 표준을 벗어난 사상 유례가 없는 사건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21장 의학, 볼록성, 불투명성

이번 장에는 아주 간단한 의사결정의 원칙과 경험법칙이 등장한다. 물론 부자연스러운 것을 제거한다는 의미에서 비아 네가티바다. 의학의 쓸데없는 개입을 줄이지 않으면 특정 약물과 치료법의 선택 혹은 음식과 생활방식의 조정은 마음의 위안을 줄지는 몰라도 그 혜택이 아주 작아서, 잠재적으로 속아 넘어가기 쉬운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부자연스러운 것은 혜택을 입증할 필요가 있지만, 자연스러운 것은 그럴 필요가 없다. 앞서 설명했던 통계적 원칙에 따르면, 자연은 인간에 비해 훨씬 덜 속아 넘어간다. 그리고 복잡한 영역에서는 오직 시간, 그것도 오랜 시간만이 증거가 된다. 증거가 있습니까? 라는 말에 담긴 오류, 즉 해롭다는 증거의 부재를 해롭지 않다는 증거로 오인하는 것은 질병의 증거의 부재를 질병의 부재의 증거로 잘못 해석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는 교육받은 사람들에게서 자주 발생하는, 증거의 부재를 부재의 증거로 오인하는 것과 같다. 교육은 사람들에게 더욱 확증을 갖고 반응하도록 하여 논리적으로 단순한 오류에 빠져들기 쉽게 만든다. 그리고 비선형성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해롭다나 이롭다는 간단한 진술이 통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복용량에 달려 있다.

우리가 문명의 질병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익에 반하여 자신의 삶을 안락하게 만들려는 인간의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왜냐하면 안락한 것은 프래질한 것이기 때문이다.

의원성 질환의 첫 번째 원칙은 다음과 같다. 어떤 약물이나 부자연스러운 개입 절차가 위험하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피해를 입증하는 증거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입증의 책임은 부자연스러운 것을 제시하는 사람들에게 있다. 두번째 원칙은 반응이 선형이 아닌 비선형이라는 것이다.

이 장에서 내가 하는 이야기는 리스크 관리에 근거한다. 어떤 사람의 병이 아주 심각하다면 의원성 질환을 고민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경계에 있는 경우는 위험을 동반한다.

진화는 본질적으로 강건함을 지닌 볼록 팅커링 혹은 볼록 브리콜라주에 의해 일정한 방향 없이 진행된다. 다시 말해, 진화는 지속적이고 반복적이며 작고 국지적인 실패 덕분에 확률적으로 잠재된 이익을 얻는 과정이다. 인간이 하향식 지배와 통제를 받는 과학에서 얻은 것은 정확하게 그 반대다.

법에는 무죄가 입증될 때까지 유죄가 아니라 유죄가 입증되기 전까지 무죄라는 이분법이 있듯이 내가 생각하는 원칙은 다음과 같다. 대자연이 하는 일은 그렇지 않다고 입증될 때까지는 논리적으로 옳다. 그러나 인간과 과학이 하는 일은 맞다고 입증될 때까지는 결함이 있다. 자연에 맞서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할 때(각종 약물이나 자연상태의 것보다 더 좋은 혜택을 준다고 주장할 때) 우리에게 해롭지 않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할 책임은 바로 그들 자신에게 있다.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질병이나 참기 힘든 고통을 동반하는 질병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정보에 자주 접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병원을 자주 찾는 것이 해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7장에서 설명했던, 의사들이 잡음에 과잉반응하는 것만으로도 환자를 죽이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의사들이 표본이 갖는 정상적인 가변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통계적 유의성은 전문가들을 현혹시키지만 결과의 규모와 효과의 중요성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

내가 혐오하는 것은 어설픈 합리주의와 생목의 오류에 빠져든 사이비 학문을 가르치는 강연이다. 기지의 대상에만 관심을 갖고 미지의 대상을 무시하는 강연 말이다. 합리주의가 더욱 세련되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지 못하다고 믿고 행동하는 것이다.


22장 오래 살기 위해서, 그러나 너무 오래 살아서는 안 된다.

인간이 의학 덕분에 오래 산다고 해서 모든 의학적 치료가 우리의 수명을 연장한다고 추론하는 것은 심각하게 잘못되었다.

소대 로마의 시인 엔니우스는 좋은 것은 대부분 나쁜 것의 부재에 있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행복은 부정의 개념으로서 가장 잘 표현된다. 불행을 제거함으로써 행복해 질 수 있다. 행복의 추구가 불행의 회피와 동등하지 않다.

부의 의원성 질환은 가난과 소박함이 아니라 부와 세련됨에서 비롯된다. 돈이 스스로 의원성 질환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가난을 좋게 받아들이면 이로부터 혜택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삶의 대부분의 문제는 소유한 것으로부터 나온다. 많은 것을 소유했다면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더 많아진다.

일부 영역에서는 비정규성이 혜택을 주는 반면, 정규성은 피해를 준다. 아마 우리가 가장 절실하게 고쳐야 할 식사 습관은 식사를 닥치는대로 하거나, 최소한 규칙적인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균형 잡힌 영양 섭취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더라도 전체적으로가 아니라 매 식사 때마다 이런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런 영양소를 한꺼번에 섭취하는 것과, 전체적으로는 섭취하지만 따로 섭취하는 것에는 커단 차이가 있다. 결핍은 스트레스 요소고 스트레스로부터 회복할 수 있다면 스트레스는 도움이 된다.

인간은 가능한 한 오래 살 것이라는 근대가 주는 환상을 갖고 있다. 마치 우리들 각자가 최종 생산물이라는 생각을 갖고서 말이다. 이런 '나 자신'을 단위로 보는 생각은 계몽주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이와 함께 프래질이 등장했다. 계몽 주의 시대 이전 사람들은 집단과 미래 세대를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슬프게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 경제 시스템은 미래 세대에게 정부의 부채를 떠넘기고 자원을 고갈시키며 주식 애널리스트와 은행업자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7권 프래질과 안티프래질의 윤리

승부의 책임은 프래질을 초래하여 피해를 보게 만든 장본인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말이다. 불투명하고 복잡한 세상에서는 작은 이득은 당장이지만 큰 피해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타나기 때문에 인과관계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을 승부의 책임이 프래질을 경감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23장 승부의 책임

이번 장에서는 누군가는 상승국면에 있고 다른 누군가는 하강국면에 있을 때 우리가 이런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살펴본다. 근대가 낳은 최악의 문제는 양 당사자 간의 프래질과 안티프래질의 극히 해로운 이전에서, 어느 한쪽은 혜택을 얻고 다른 한쪽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손해를 보는 데 있다. 프래질과 안티프래질의 이전은 윤리와 법 사이의 간격이 커지면서 더욱 용이해진다.

현재 사회와 과거 사회 간의 큰 차이는 영웅주의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이제는 다른 사람을 위해 하강국면에 처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수용했던 사람의 희생정신이나 그들의 영향력을 존중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 반대다. 사회로부터 공짜 옵션을 훔쳐간 은행업자, 대기업 임원, 정치인이 영향력을 행사한다. 영웅주의는 희생을 의미한다. 스토아 철학에서 용기는 자신의 충동과 맞서 싸우려는 용기를 말하며 신중한 행동에서 나온다고 본다.

우리는 경제적이거나 하찮은 물질적 조건으로 정의되는 행복을 거부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영웅주의를 배제하면서 미화시켜 놓은 중산층의 가치에 얼마나 당혹스러운지 모른다. 이런 가치는 세계화에 따라서 널리 빠르게 퍼져 거룩한 영웅주의에 대해 무감각해지도록 만든다. 결국 은행과 담배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거의 모든 것에 복종하고, 법에 순종하고, 주식 투자에 의존하고 대출을 받아 집을 사 주말에는 교외 활동을 즐기는 생활을 추구한다. 돈을 많이 벌어 성공한 사람들을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영웅이라고 불릴 것이다.

반쪽짜리 인간은 자신의 의견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펼치기 위해 위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당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위엄 있게 운명을 맞치한다면 자신을 작아 보이게 단드는 행동을 할 수 없다. 반면 위험을 무릎쓰지 않는다면, 자신을 커 보이게 만드는 행동을 할 수 없다. 그리고 당신이 위험을 받아들일 때, 위험을 받아들이지 않는 반쪽짜리 인간이 가하는 모욕은 개 짖는 소리에 불과하다. 사람은 개가 짖는다고 모욕을 느끼지 않는다.

첫번째 원칙은 나는 여론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제공한 정보나 의견을 따르던 사람에게 피해가 발생했을 때 '승부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제를 분석하고 예측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분석 결과에 따라 행동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로부터 잃는 것이 있어야 한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예측은 리스크가 따르는 행위다.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형태의 공해보다 유해 성분이 더 많이 들어 있다. 두번째 원칙은 여분을 확보해 안전의 범위를 넓히며 최적화를 피하고 리스크에 대한 노출에서 비대칭성을 경감한다는 의미다.

나는 성공과 실패를 떠나 기업가나 리스크를 수용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하고 리스크에 노출되었을 때 이를 수용하지 않는 학자, 정치인처럼 말만 앞세우는 사람은 낮게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즉 말만 앞세우는 사람에게 공짜 옵션을 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식인과 비평가의 전반적인 생각을 접하는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공정한 입장에서 말하자면, 피해에 노출되지 않고 승부의 책임이 없는 사람이 실천 없이 말만 앞세우는 것은 윤리적으로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다. 곧 당신의 의견을 따르는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게 책임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과연 이것이 공정한가? 오늘날 지식인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그래서 이전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지식 사회는 한 사람에게서 지식과 실천의 괴리를 초래해 사회 전체를 프래질하게 만든다.

우리는 선택 편향을 범하고 기억을 끊임없이 수정하기 때문에 과거는 변하기 쉽다.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속기 쉬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뇌가 그렇게 움직이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 행동은 불확실함, 부정확함, 애매함, 사람들을 더욱 지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이기적인 심리적 바이어스를 모두 없애준다. 잘못된 판단에는 비용이 따른다. 물론 허튼 소리를 하고 있는 지 확인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사람들의 판단이 자기 자신의 투자를 통해 표출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금융 시스템의 붕괴를 예상했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투자 포트폴리오에서 금융 업종의 주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의원성 질환을 일으키는 의사들은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사실을 어느 정도는 알고, 문제가 생기면 낮은 자세를 취한다. 전문가가 사후적으로 자신은 피해를 경고했다고 주장하면서 지위를 이용해 퍼뜨리는 의원성 질환은 훨 씬 더 문제가 심각하다. 그들은 자신이 의원성 질환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의원성 질환을 가지고 의원성 질환을 고치려 한다.

누구에게든지 의견, 예상, 자문을 얻으려 하지 말라. 단지 그들의 포트폴리오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만 물어보라.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포트폴리오는 이런 발언과 일맥상통해야 한다. 그리고 규제 당국은 예측에 바탕을 둔 접근방식(즉 쓰레기 과학)을 공인하는 프래질리스타가 되기를 거부해야 한다.

현실세계에서는 어떤 사람이 얼마나 자주 옳았는지, 빈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런 빈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말만 앞서는 사람이 아니라 실행가가 되어야 한다. 대체로 프래질한 보상은 이익이 거의 없거나 아주 없고, 안티프래질한 보상은 손실이 거의 없다. 따라서 안티프래질한 사람이 한번만 옳다면 오랫동안 큰 손해를 보지 않고 틀려도 된다. 반면 프래질한 사람은 한번 틀리면 끝장이다.

현실 세계에서의 의사결정, 즉 실행은 탈레스주의자들의 특징을 대변한다. 반면에 말로만 예상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의 특징을 대변한다.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은 옳은 것을 추구한다. 속아 넘어가지 않는 사람은 돈을 벌려고 한다'고 표현할 수 있다. 혹은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은 논쟁에서 이기려고 한다. 속아 넘어가지 않는 사람은 결과에서 이기려고 한다.' 혹은 '논쟁에서 지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대자연에서 의견과 예측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생존이다.

나는 예측 연구자들에게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자신이 책임지도록 하는 것만이 과학에서 나타나는 심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제부터는 다음과 같은 간단한 경험 법칙을 받아들이도록 하라. 자신의 아이디어를 현실 세계에 적용하는 과학 연구자들은 그 아이디어를 자신의 일상 생활에도 적용하는가? 그렇다면 그가 하는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 그렇지 않다면 그가 하는 말을 무시하라.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짜증나게 한다. 기업은 어떤가? 사람들은 왜 자신이 위대하다고 선전하는 기업을 보면서 짜증을 내지 않는가? 이러한 이유에 해당하는 세 가지 오류는 다음과 같다. 스스로 선전할 수 있다는 뻔뻔스러움을 갖고 있다는 생각. 두번쨰는 첫번째 오류를 예상하자 기업은 자신을 좋게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약점은 숨긴다. 세 번째는 심각한 오류다. 기업은 우리 인지 편향과 무의식적 연상을 이용해 자신이 판매하는 제품을 거짓되게 선전하려고 한다. 이것은 비열한 짓이다. 자본주의가 갖는 문제의 핵심은 집단의 이해관계와 개인의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다는 데 있다. 기업은 자연적인 윤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대차재조표만 들여다볼 뿐이다. 결국 기업이 하는 일은 주식 애널리스트가 부과한 기준을 만족시켜주면서 스스로 사기꾼이 되는 것이다.

문화적이든 생물학적이든 이 모든 문제들이 승부의 책임이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들이다. 즉 자신의 이익을 챙겨가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비대칭성 때문에 나타난다. 이제 이런 시스템이 붕괴하려고 한다. 마치 더 이상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속일 수는 없다고 말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경영자들에게는 이런 붕괴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바로 대리인 문제 때문에 그들의 관심은 기업이 아니라 자신의 현금 흐름에 가 있다. 그들은 나중에 실패하더라도 피해를 보지 않는다.

결국 기업은 프래질하므로 장기적으로는 대리인 문제가 주는 압박으로 붕괴하게 될 것이다. 반면 경영자들은 보너스를 위해 기업을 등쳐먹고 나서는 남은 뼈를 납세자에게 던져줄 것이다. 이 모든 움직임은 앞으로 우리들의 돈으로 치르게 될 기업의 장례식을 지연시킬 뿐이다.


24장 윤리를 직업에 짜 맞추다.

부가 사람들을 더욱 독립적으로 만든다는 믿음은 잘못되었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만으로도 충분하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지금보다 더 부유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많은 빚을 져본 적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룬 적도 없었다. 근대는 새로운 것과 더 많은 것을 갈망하며 영원히 애를 태우면서 살아야 하는 계층을 만들어 냈다. 당신은 트레드밀(더 좋거나 새로운 것만 찾는 행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을 신뢰해서는 안된다.

몽테뉴는 세네카의 저서 자선에 관하여에 나오는 주장을 인용하면서 우리는 모든 전문 직업인들을 규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잡은 사적인 생각과 동기를 파고들면 그들의 소망은 거의 변함없이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대가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논점은 직업을 통해 생계를 꾸려간다는 것이 본질적으로 나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런 사람이 다른 사람이 관련된 공공의 문제를 다룰 때 저절로 문제의 인물이 되어버린다는 데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자유인은 생각이 자유로운 사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자유로운 시간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자유는 정치적으로 진실한 경해를 갖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아랍어와 히브리어에는 자유인의 손은 저울이라는 말이 있다. 자유인의 의미는 쉽게 정의되지 않는다. 결국 자기 자신만의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유인이다. 자유인은 다른 상황에서도 결코 하지 않을 무엇인가를 억지로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그리스인들이 보기에는 자유로운 시간을 가진 사람만이 자유로운 생각을 갖는다.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자유로운 생각을 갖는다.

옛날의 도시국가 혹은 근대의 지방자치제에서는 부도덕한 행동을 했을 때 받게 되는 수치심이 보상을 더욱 대칭적이도록 해주었다. 반면 너무나도 신성한 국민국가와 같은 커다란 조직 사회에서는 직접적인 만남이나 사회적 뿌리가 중요한 의미를 잃었으므로 수치심은 규율을 지키게 만드는 기능을 중단하게 된다. 우리는 수치심을 느끼는 사회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규정이 복잡할수록 네트워크는 더욱 관료화된다. 그리고 공직자의 우위가 자신의 차별적인 지식에 대한 볼록 함수가 되면서, 허점과 결함을 아는 공직자들이 이로부터 이익을 취하게 된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일종의 독점권 즉 다른 사람의 희생으로부터 나타나는 비대칭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런 비대칭성은 경제 전반에 퍼져 있다. 이런 현상을 발생하게 만드는 원인 중 첫 번째는 규제가 복잡할수록 내부자들에 의한 중개 거래가 더 많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두 번째는 시스템이 복잡해지면 규제 조항과 규제 정신의 차이를 인식하기가 어려워진다. 셋째 암묵적인 뒷거래는 이런 행위에 대한 규제를 쉽게 피해가도록 만든다.

인간은 어떤 사후적 의견을 옹호할 만한 주장이나 윤리적 명분을 항상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체리피킹에 해당되는 이런 태도는 위험하다. 행동하고 나서가 아니라 행동하기 전에 윤리 원칙을 제시해야 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이야기를 짜맞추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연구정신을 훼손하면서 지식 형성에 큰 해가 되는 데이터를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체리 피킹의 또 다른 방식을 설명하겠다. 더 많은 데이터는 더 많은 정보를 의미한다. 그러나 더 많은 잘못된 정보를 의미하기도 한다. 데이터가 많아지면 편차가 커지고 이런 편차는 정보(신호)가 아니라 주로 소음(분산) 때문이다. 컴퓨터를 통한 관찰 연구는 온갖 종류의 결과를 만들어낸다. 데이터가 많아지면 잘못된 상관관계를 나타낼 여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즉 데이터에 대해 비선형성을 띤다. 나는 데이터에 정보가 없다는 사실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정보를 정말 찾기 힘들다는 데 있다. 데이터는 오직 비아 네가티바를 통해서만 제대로 전해 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무엇인가를 확증 할 때가 아니라 그것의 정체를 폭로할 때 더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비극은 기존의 연구를 모사해 그 결과를 부정하기 위한 연구로는 연구비를 얻어내기가 아주 어렵다는 데 있다. 현실은 모사 연구를 통해서는 영웅이 될 수 없도록 한다. 과학은 경쟁이 되어서는 안 되고, 순위를 매겨서도 안 된다. 이런 시스템이 어떻게 붕괴될지는 뻔하다. 또한 지식에 대리인 문제가 개입 되어서도 안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는 옵션과 안티프래질을 제거하는 것이 전부다.


25장 결론

무작위성이 한데 모여 있지 않고 넓게 퍼져 있도록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큰 것은 모두 가변성이 커지면서 피해를 본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크고 빠른 것은 혐오의 대상이다. 근대는 가변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은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주지 않는다. 이때 트라이애드는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알려준다. 세상이 갖는 매력은 우리가 세상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생명체는 가변성으로부터 이익을 본다. 당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신이 가변성을 좋아하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노력이 없는 성과는 의미가 없다. 슬픔이 없는 기쁨도 의미가 없다. 불확실성이 없는 확신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인 리스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도덕적인 삶도 마찬가지로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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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래밍과 연관한 단상


프로그래밍의 가장 큰 목표 중 하나는 변화에 대한 대응이다. 개발을 안티프래질하게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완성을 목표로 개발한다는 것은 매우 프래질하다는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수정, 변화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개발해야 한다. 더불어 변화에 적극적인 마음을 열어 놔야 한다. 하지만 빈번한 변화는 좋지 않다. 새로운 것은 기존 것 보다 프래질한 위험이 더 크기 때문이다. 시행착오를 통해서 수정 후 잘못됨을 알았을 때는 실패에서 배우고 기존의 상태로부터 다시 시도해야 한다. 보상은 선형적이지 않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노력을 많이 한다 해도 보상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타나는 생각하지 못하는 보상이 나타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끈기 있는 꾸준함이다. 보상 그 자체에 집중하면 보상 없는 노력은 그 자체로 고통이다. 하지만 노력 그 자체에 집중한다면 끈기 있는 행동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돈과 같은 보상에 집착하는 순간 순수하고 보람찼던 행위가 고통스런 순간으로 변질된다.


스트레스 후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 적응할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회복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없이 스트레스만 받는 것은 우리에게 해롭다.


단위프로젝트로 소규모로 작게 유지하며 실서버 배포시 변경한 부분에 해당하는 작은 단위로써 배포를 진행한다면 문제를 좀 더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중앙관리에 의존하는 시스템을 만들기 보다는 작은 단위들에 의존하는(역의존)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규모가 커지고 그것을 중앙집중시스템을 통해서 운영한다면 하나가 무너질 때 전체가 무너진다. 마이크로 서비스를 넘어 더 작게 유지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지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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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어떤 주장이나 이론과 반대되는 내용이 있고 그것이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다면 그 두 가지가 모두 옳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중요한 점은 상황에 따라서 혹은 주체에 따라서 옳은 내용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우리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만든다.


인간관계에 안티프래질 개념을 도입해서 생각해보자면 사람들에게 물질적, 정신적으로 어떤 호의를 베푸는 것이 작은 손실과 함께 큰 이득을 보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커피를 사주는 것을 단순한 손실로 볼 수 있지만 이것은 보이지 않는 잠재된 혜택을 줄 수도 있다. 물론 안티프래질에서 우리가 원하는 개념은 어떤 행위가 빈도로써 자주 작은 혜택을 보는 게 아닌 보상으로써 드물지만 큰 혜택을 보는 것에 있다. 내가 베푼 호의가 적절하게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작은 손실로써 감내할 수 있을 정도에서 꾸준히 호의를 베푼다면 언젠가 훌륭한 사람을 만나 적절한 보상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리스크 관리는 결국 모든 리스크에 대한 예측과 그에 대한 대비 뿐만 아니라 예상하지 못하는 리스크에 대해서도 대비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전혀 발생하지 않을 것 같은 리스크에 대비하느라 당장의 이익을 감소 시킨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숨은 혜택이 더 크기 때문에 위험관리와 동시에 더 큰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 숨은 혜택은 생존과 장기적 이익이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살아남는 것이다. 우리에게 수 많은 기회가 있겠지만 그 기회를 잡느냐 마느냐 이전에 먼저 생존해 있어야 기회와 마주할 수 있다.


정치인을 볼 때 중요한 두 가지

정치인이 보수인지 진보인지 중요하지 않다. 첫 번째는 언행일치를 봐야 하고 두 번째는 언행이 자신의 이익 때문인지 국민의 이익 때문인지 만 보면 된다. 여기서 언행일치는 자신의 잘못된 판단이나 실수를 인정하고 행동을 바꾼다면 이는 문제될 게 없다.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최소한 그 행동을 본인이 했어야 상대방에게 피력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이든 결국 적절한 지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기에 이론에 자신의 행동을 맞추지 말고 행동에 이론을 맞춰야 한다. 우리의 삶이란 이 지점을 찾아 가려는 노력 그 자체다. 하지만 결코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개개인이 똑똑해질수록 사회는 더 프래질해진다는 생각을 증명할 수 있을까? 이것은 똑똑해진다는 것을 잘못 이해하면서 생긴 질문일까?

어설프게 똑똑해지는 것이 문제일 수 있다.


개개인이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집단은 합리적인 것일까? 만약 개개인이 합리적이라면 집단은 비합리적일까?

개개인의 비합리성이 다양성을 만들고 집단을 다양한 상황에서 합리적인 결정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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