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 8. 00:11ㆍ책
인에비터블 미래의 정체 - 케빈 켈리
저자의 견해를 살펴보면 우리는 아득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으로 향하고 있다.
이 책은 미래를 정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정확하게 볼 수 없음을 상기시켜준다. 다만 우리가 오늘을 기준으로 나아가는 방향과 현상을 설명한다. 언제나 우리는 현재를 살아간다. 그렇기에 언제나 한계에 부딪힌다.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여전히 같은 생각이다. 하지만 우리가 염세주의와 냉소주의에 가로막혀 더 이상 미래를 상상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 질 것이다. 상상은 우리의 원동력이다. 우리가 바라던 바라지 않던 우리가 마주할 미래는 우리의 흐름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래는 현재의 연장선이다.
저자는 12가지의 동사로 현재의 산업흐름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단어들이 현재에 국한되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도 들어맞는 이야기다. 다만 이러한 동사들이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동사들은 독단적이지 않다. 서로 교차되고 융합된다. 사실 이 말이 저 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의 수 많은 가능성은 서로 교차되어 또 다시 수 많은 가능성을 만드는 것과 똑같다. 그 가능성은 서로의 가능성에 도전하기도 하며 융합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무한히 반복된다. 그렇기에 저자의 말대로 우리가 알게되는 앎의 영역보다 알 수 없는 무지의 영역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답은 새로운 질문을 낳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능성에 도전하여 답을 찾는다면 그 답은 하나 이상의 질문을 내놓는다. 그러므로 무지의 영역은 더욱 커진다. 그렇게 앎과 무지의 간극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벌어진다. 아는 것 보다 모르는게 더 많은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 책을 다 읽고나서 아이러니하게도 저자의 예측까지도 뒤집을 미래가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상상의 안내서다. 그 상상에서 답이 아닌 질문을 찾길 바란다.
여담이지만 이 책은 두껍다. 이 책의 한 파트만을 읽어보라 추천한다면 '질문하다'를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개인적으로 현재 느끼는 정제되지 않은 과도한 정보에 대한 부조화를 정확하게 설명했다.
되어가다
한 도구를 얼마나 오래 썼든 간에, 끊임없는 업그레이드는 당신을 새내기로 만든다. 때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감조차 잡지 못하는 초보자 같은 신세가 된다는 말이다. 이 '되어가다'의 시대에는 누구나 새내기가 된다. 더 심할 경우 영원히 새내기로 남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늘 겸손할 수밖에 없다.
불편함이 없는 세계는 유토피아다. 하지만 그곳은 정체된 세계이기도 하다. 어느 측면에서 완벽하게 공평한 세계는 다른 면에서는 끔찍하게 불공평할 것이다. 유토피아는 해결할 문제가 전혀 없는 곳이며, 따라서 기회도 전혀 없는 곳이다.
프로토피아 모드에서는 모든 것이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낫다... 프로는 과정과 진보라는 개념에서 유래한다. 이 미묘한 진보는 극적이지도 흥분되지도 않는다. 프로토피아가 새로운 혜택 못지않게 많은 새로운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에, 그 진보를 알아차리기 어렵다.
프로토피아는 '되어가기'이기 때문에 알아보기가 어렵다. 그것은 다른 것이 변하는 방식을 계속해서 바꾸는 과정이며, 그 변화 자체는 변이를 일으키고 성장해간다. 계속 모습을 바꾸는 부드러운 과정에 환호성을 질러대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모두가 예측하지 못한 거은 이 멋진 새로운 온라인 세계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거대 기관이 아니라 사용자가 만들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페이스북, 유튜브, 인스타그램, 트위터가 제공하는 콘텐츠는 전부 직원이 아니라 사용자가 만든다...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참여'라는 자양분이다... 나머지는 의무감이나 열정을 연료로 삼아 구축된 것이다.
인지화하다
어떤 기업이 이 선순환(AI를 사용하면 그 사용으로 인해 영리해지는 순환)에 진입하면 너무나 빨리 대단히 커져서 다른 모든 신생 경쟁자를 압도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우리 AI의 미래는 두세 개의 커다란 범용 클라우드 기반 상업 지능의 과두 체제에 지배될 가능성이 높다.
의식하는 지능 대신에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인공 영리함이다. AI가 발달할수록, 우리는 그들이 의식을 지니지 모하게 하는 방법을 고안해야 할지 모른다.
초연결된 세계에서,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은 혁신과 부의 원천이다. 단지 영리해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상업적 동기가 있어야 우리가 만드는 모든 것에 저렴하게 영리함을 내장시킨 강력한 AI가 널리 흔해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새로운 유형의 지능과 전혀 새로운 사고방식을 창안하기 시작할 때 보상은 더 클 것이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기계적 발명품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더 잘하는 기계가 아니라, 우리가 아예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기계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생각 기계는 우리가 더 빨리 더 잘 생각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기계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기계다.
증명을 인간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일련의 알고리즘을 신뢰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러려면 그 알고리즘을 신뢰해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아내는 새로운 기법이 필요하다.
인공지능 도래의 가장 큰 혜택은 AI가 인류를 정의하는 일을 도울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줄 AI가 필요하다.
지극히 현실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발명품이 우리에게 직업을 할당한다. 각각의 성공한 자동화는 새로운 직업을 낳는다.
누구나 개인용 로봇을 이용하겠지만, 단순히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성공을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성공은 그보다는 로봇 및 기계와 일하는 과정을 가장 최적화하는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다. 생산의 지리적 집적이 중요할 것이다. 노동비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전문성 차이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로봇 공생이다. 우리 인간은 로봇을 위해 일자리를 계속 만드는 일을 맡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결 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적어도 하나의 '직업'을 계속 지니게 될 것이다.
로봇은 우리가 자신을 위해 새로운 일, 즉 우리 자신의 존재를 확장시킬 새로운 일을 발견하도록 도울 것이다. 로봇은 우리가 이전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 되는 데 집중하도록 할 것이다.
흐르다
당신의 스마트폰에는 새로운 운영 체제가 설치되는 흐름이 진행되므로 당신은 몇 달마다 더 나은 스마트폰을 지니게 된다. 예전 같으면 새로운 기능이나 혜택을 보려면 새로운 하드웨어를 사야 했는데 말이다... 이 지속적인 업그레이드의 흐름은 꾸준히 이어진다.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취향에 걸맞은 꿈을 실현시킨다. 끊임없는 개선이라는 강이 꾸준히 흐른다.
유동성을 향한 이 불가피한 전환은 현재 사회의 다른 거의 모든 측면도 바꾸고 있다. 음악이 유동성의 세계로 나아온 과정을 살펴보면 우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가 드러날 것이다.
무료한 무료 디지털 복제가 판치는 이 새로운 초포화 디지털 우주에서는 사본이 너무나 흔하고 저렴하기에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복제가 불가능한 것뿐이다. 기술은 이제 복제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단순화하면 이렇다. 복제물이 초풍부해질 때 그것은 무가치한 것이 된다. 대신에 복제할 수 없는 것은 희소해지고 가치가 있게 된다.
복제하기가 어려운, 따라서 이 클라우드 경제에서 가치가 있는, 신뢰와 비슷한 특성을 지닌 것은 많이 있다. 그것을 알아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에 누군가가 굳이 돈을 지불하려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에 돈을 지불할 때 그들이 구입하는 것은 무엇일까?
공짜보다 좋은 생성적 가치 여덟 가지
즉시성, 개인화, 해석, 진품, 접근성, 감각, 후원, 발견
가치는 사본 자체에서 작품을 회고하고 주석을 달고 개인화하고 편집하고 진본임을 입증하고 화면에 띄우고 표시하고 옮기고 이용하는 다양한 방식 쪽으로 옮겨갔다. 이제 중요한 것은 작품을 얼마나 잘 흐르게 하느냐다.
흐름의 4단계
1단계(고정됨) 흐름 - 2단계(무료) 흔한 - 3단계(흐르기) 공유하기 - 4단계(개방하기) 되어가기
우리는 몇몇 유형의 미디어를 대상으로 이 흐름의 4단계를 시작했지만, 대체로 1단계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 활동과 기반 시설중에는 유동화가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 훨씬 더 많이 남아 있다. 그 부분도 유동화하여 흐를 것이다. 비물질화와 탈중심화를 향한 움직임은 꾸준하고 거대하기에 그 흐름은 불가피하게 계속 진행될 것이다.
화면 보다
저렴한 유형의 복제물에 힘입어서 수백만 명의 창작자는 후원자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껄끄러운 상황에 내몰리는 일 없이 대중에게 직접 예술품을 판매하여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새로운 활동에는 읽기보다는 '화면 보기'라는 용어가 더 적절할 것이다. 화면 보기는 글을 읽는 것뿐 아니라, 글을 시청하고 이미지를 읽는 것도 포함된다.
디지털로 태어난 책은 직접적으로는 언제든 어느 화면으로든 흐를 수 있게 하는 효과를 일으킨다. 책은 불러낼 때 출현한다. 읽기 전에 책을 구입하거나 쟁여 놓을 필요가 사라진다. 책은 풀품이라기 보다는 당신의 시야로 흘러드는 흐름에 더 가까워 진다.
책의 미래를 내다보는 기존의 관점은 책이 공동 도서관의 서가에 꽂혀 있는 그대로 서로 독립된 채, 고립된 항목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본다. 각 책은 바로 옆에 있는 책을 거의 알아보지 못한다. 저자가 책을 완성할 때, 그책은 고정되고 완결된다.
위피키디아(그리고 웹)에 엄청난 힘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 관계의 그물이다. 위키피디아는 최초로 망을 이룬 책이다. 시간이 더 흐르면 각 위키피디아 페이지는 모든 문장이 교차 참조되면서 파란 링크로 가득해질 것이다... 따라서 책은 제본된 상태에서 벗어나 서로 엮이면서 하나의 거대한 메타책, 즉 보편적인 도서관을 구축할 것이다. 이 신경망처럼 연결된 도서관에서 생겨날 집단 지능에 힘입어서 우리는 하나의 고립된 책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링크와 태그는 지난 50년 동안의 가장 중요한 발명품 중 두 가지일지 모른다. 당신이 무언가에 링크나 태그를 다는 것은 익명으로 웹에 마크업을 함으로써 웹을 더 영리하게 만드는 행위다.
우리는 책을 구성요소들로 해체했다가 웹으로 엮겠지만,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책의 더 고차원적인 조직화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경제에 남아 있는 희소성이다. 책은 주의의 단위다. 사실 자료는 흥미로우며, 생각은 중요하지만, 이야기, 좋은 논증, 잘 짜인 서서만이 결코 잊지 못할 경이로움을 안겨준다. 뮤리엘 루카이저의 말마따나, '우주는 원자가 아니라,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미래에는 우리 몸의 어느 부위가 내용에 반응하지 않으면서 화면을 본다는 것이 이상해 보일 것이다.
이 끊임 없는 '자기 추적하기'를 통해 우리는 자기 삶의 완벽한 '기억'을 갖추면서, 어떤 책도 제공하지 못할 경이로운 수준으로 자신을 객관적이고 정량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화면은 우리 정체성의 일부가 된다.
우리는 아이맥스에서 애플 워치에 이르기까지, 온갖 규모와 크기의 화면을 보고 있다. 머지 않아 우리는 어떤 종류이든 간에 화면에서 결코 멀리 떨어질 수 없게 될 것이다. 화면은 우리가 답, 친구, 뉴스, 의미,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할 때 맨 처음 들여다보는 무언가가 될 것이다.
접근하다
해가 갈수록 나는 사용하는 것을 덜 소유하게 된다. 소유는 예전보다 덜 중요해지고 있다. 대신에 '접근하기'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접근을 향하고 소유에서 멀어지는 이 장기적인 운동을 추진하는 심오한 기술 추세 다섯가지
탈물질화, 실시만 주문형, 탈중심화, 플랫폼 시너지, 클라우드
상품은 소유를 부추기지만 서비스는 소유를 단념시킨다. 소유하는 특권에 따라오는 배타성, 통제권, 책임이 서비스에는 없기 때문이다.
비트코인 자체가 성공하느냐 여부를 떠나서, 낯선 사람들 사이에 극도로 높은 수준의 신뢰를 형성할 수 있는 블록체인이라는 혁신 기술은 제도와 산업을 더욱 탈중심화할 것이다.
탈중심화한 웹,인터넷은 현재 핵심 고용물이다. 웹이라는 물품은 마치 내가 소유한 양 내게 봉사하지만, 그것을 유지 관리하는 데 내가 해야 할 일은 거의 없다... 우리 사회가 탈중심화 할수록 접근하기가 더 중요해진다.
데이터 축적은 경쟁 우위처럼 비치며, 데이터의 자유로운 공유는 법으로 제한되므로, 기업이 자신의 데이터를 창의적이고 생산적이고 책임 있게 공유하는 법을 터득하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릴 것이다.
아마존, 페이스북, 구글의 거대한 클라우드는 분산되어 있긴 해도, 탈중심화해 있지는 않다. 그 기계는 거대 기업이 운영하는 것이지, 당신의 별난 동료가 쓰는 컴퓨터의 별난 망을 통해 운영되는 것이 아니다.
소유자 없는 망은 현재 우리 통신 기반 시설에 적용되는 규제와 법망의 상당수를 뒤엎는다. 클라우드는 많은 지역에 걸쳐 있다. 누구의 법이 적용될까? 당신 주거지의 법인가, 서버가 있는 지역의 법인가, 국제 교환에 관한 법인가? 모든 작업이 클라우드에서 이루어진다면, 누가 당신에게 세금을 매길 것인가? 자료는 누구의 소유일까? 당신인가 클라우드인가? 당신의 모든 이메일과 음성 통화가 클라우드를 거친다면, 전달되는 내용을 책임지는 당신이 설익은 생각이나 기이한 몽상을 할 때, 당신이 진짜로 믿는 것과 다른 식으로 그것을 다루어야 할 까? 당신은 자신의 생각을 소유할까? 아니면 그것에 접근하고 있을 뿐일까? 이 모든 질문은 클라우드와 메시뿐 아니라 모든 탈 중심화한 시스템에 적용된다.
공유하다
나는 '사회주의'라는 용어에 많은 독자가 껄끄러워할 것을 안다. 그 용어는 엄청난 문화적 짐을 안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공산주의적','공산주의자','집단적' 같은 용어도 마찬가지다. 내가 '사회주의'를 택한 이유는 사회적 상호작용에 의존함으로써 힘을 얻는 다양한 기술을 가리키기에 가장 좋은 단어이기 때문이다. 소셜 미디어에 '사회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도 같은 이유다.
사회적, 사회적 행동, 소셜 미디어, 사회주의, 생산 수단을 소유한 많은 이들이 공동의 목표를 향해 일하고 자신의 산물을 공유할 때, 임금을 받지 않고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과실을 공짜로 즐길 때, 그것을 새로운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것도 불합리하지 않다. 그들의 공통점은 '공유하다'라는 동사다. 사실 일부 미래학자들은 새로운 사회주의의 이 경제적 측면을 '공유 경제'라고 한다. 이 세계의 주된 통화가 공유이기 때문이다.
공유하기는 가장 온건한 형태의 디지털 사회주의이지만, 이 동사는 공동체 참여의 모든 더 상위 수준의 토대 역할을 한다. 망 세계 전체의 기초 요소다.
공동체의 집단 영향력은 기여자의 수에 비례하여 커진다. 그것은 사회 제도의 핵심이다. 합이 부분을 능가한다. 전통적인 사회주의는 민족국가를 통해 이 능력을 이끌어냈다. 현재 디지털공유는 정부와 분리되어 있고 국제적인 규모에서 작동한다.
온라인 협업의 새로운 도구는 자본 투자자를 피하고 생산자가 소유권을 간직할 수 있는 공동체 방식의 생산을 지원한다.
기술적 사회주의를 자유 시장 개인주의와 중앙 집중화한 권력 사상의 제로섬 게임의 일환으로 보기보다는, 기술적 공유를 개인과 집단 모두를 고양시키는 새로운 정치 운영 체제라고 볼 수도 있다.
무급으로 일하는 동기 중 가장 흔한 것은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발전시키기 위해서였다. 한 학생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무료로 일하는 주된 이유는 내 자신의 같잖은 소프트웨어를 개선하기 위해서다."
협업에서 얻는 혜택이 많을수록, 우리는 정부의 사회화한 제도에 마음을 더 열 것이다. 북한을 통제하는 강압적이고 정신을 말살하는 체제는 죽은 것이다. 미래는 위키피디아와 이를테면 스웨덴의 온건한 사회주의 양쪽을 본뜬 잡종 형태다. 으레 의심부터 하는 이들은 이 변화에 몹시 반발 하겠지만 공유 증가는 불가피하다.
환자가 자신의 치료에 도움을 얻고자 자기 치료 결과를 공유하는 페이션츠라이크미 같은 사이트는 집단 활동이 의사와 사생활 노출의 두려움 양쪽을 이길 수 있음을 입증한다.
지금 이루어지는 협업적인 사회적 기술을 같은 방식으로 적용하려 시도하고 있다. 디지털 사회주의를 점점 더 많은 욕망의 목록에 적용하면서 그것이 먹히는지 알아보려 한다. 지금까지 나온 결과는 경악할 수준이다. 우리는 협업 기술을 이용하여 빈곤층의 보건 수준을 향상시키고, 무료 대학 교재를 개발하고, 희귀한 질병의 약을 개발할 자금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거의 모든 사례에서 공유, 협력, 협업, 개방성, 무료화, 투명성은 자본주의자가 가능하다고 여긴 것보다 더욱 현실적인 힘을 발휘했다. 매번 시도할 때마다 우리는 공유하기가 우리가 상상한것 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한다.
구글은 소비자가 눌러 공유되는 검색 결과에서 가치를 추출한 최초의 기업이었다. 일반 사용자의 클릭 하나하나가 그 페이지가 유용하다는 투표였다. 따라서 일반 사용자는 단지 구글을 이용함으로써, 구글을 더 낫게 만든었고, 구글의 경제적 가치를 더 높였다.
페이스북의 가장 강력한 자산은 이 공유 체제를 작동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창안할 필요가 있었던 지속적인 온라인 정체성임이 드러났다. 세컨드라이프의 가상 현실 같은 미래주의적 방식이 자신의 가상 모습을 공유하기 쉽게 만들었다고 한다면, 페이스북은 자신의 진짜 신원을 공유하기 쉽게 함으로써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었다.
군중으로부터 뭉게뭉게 솟구치는 창작의 구름을 담을 중간층이 어떤 형태로든 필요하다.
엄청나게 많은 기여자를 소수의 조정자 집단이 관리한다. 모질라 오픈 소스 코드 공장의 창립자인 미치 카포가 간파한 바와 같다. "굴러가는 모든 무정부 상태의 내부에는 경험자의 망이 있다."
편집과 전문성은 식품의 비타민과 같다. 많이 필요하지 않고, 커다란 몸에 미량이면 된다. 너무 많은 독성을 띠거나 그냥 배출될 것이다. 계층 구조를 적당한 양으로 주입하는 것만으로도 아주 거대한 집단에 활기를 충분히 불어넣을 수 있다.
군중의 공유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결과를 내놓곤 하며, 거의 언제나 가장 좋은 출발점 역할을 한다.
2050년에 가장 크고 가장 빨리 성장하고 가장 이익이 나는 기업은 현재 눈에 띄지 않고 알지도 못하는 공유의 측면을 활용하는 법을 터득한 회사일 것이다.
우리가 실패도 공유할 때 더 빨리 배우고 일을 더 잘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겨우 10년전 부터 였다. 모든 설익은 아이디어, 막다른 골목, 실패, 재시도의 기록은 내 자신 뿐 아니라 더 잘하기를 바라는 다른 이들에게 실제로 가치가 있다. 전체 과정을 공개하기 때문에 자신을 속이기는 더 어려워지고 어떤 일이 올바로 진행 되었는지를 알아 보기가 더 쉬워진다. 과학 조차도 이 개념을 받아 들였다. 어떤 실험이 잘 되지 않을 때, 과학자는 부정적인 결과를 공유하도록 요구 받는다. 나는 협업에서 앞서 했던 과정을 공유할 때, 학습과 성공이 더 일찍 나타난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요즘 나는 계속 연결된 채로 산다. 내가 공유하는 것들, 그리고 나와 공유하는 것들은 조금씩이긴 하지만 꾸준히 나아가면서 내게 자양분이 된다. 공유는 장시간 차단하기가 불가능하다. 침묵조차 공유될 것이다.
걸러내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필터는 콘텐츠에 집중한다. 하지만 거꾸로 콘텐츠의 관점에서 보면, 필터는 인간의 주의에 집중한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사회과학자 허버트 사이먼은 일찍이 1971년에 이렇게 간파했다. "정보가 풍부한 세계에서, 정보의 풍요는 다른 무언가의 부족을 의미한다. 바로 그 정보가 소비하는 무언가의 희소성이다. 정보가 무엇을 소비하는지는 다소 명확하다. 바로 수신자의 주의를 소비한다. 따라서 정보의 풍유는 주의의 빈곤을 낳는다." 사이먼의 통찰은 한문장으로 요약되곤 한다. "풍요의 세계에서, 희소성을 띠는 것은 인간의 주의뿐이다."
우리 뇌는 엄청난 수를 다룰 수 있도록 진화하지 않았다. 이 세계는 우리의 자연적인 능력을 초월하며, 우리가 그것과 접촉하려면 기계에 의존해야 한다. 우리가 만들어온 대안의 폭발 속에서 제대로 활동하려면 필터에 필터가 겹친 실시간 시스템이 필요하다.
경험과 개인화를 강화하는 기술 전체에 관해서 재미있는 점은 그것이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라고 압력을 가한다는 것이다.
기술이 우리를 더 균질화하고 더 대량 상품화할 것이라는 두려움은 옳지 않다. 우리가 개인화 할수록, 더 구별되기 때문에 필터가 실질적으로 구별 하기가 더 쉬워진다.
우리가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을 멈출 수 없으므로, 걸러내기가 더 늘어나는 것도 불가피하다. 우리가 만들 새로운 것 가운데 최고는 걸러내고 개인화하는, 즉 나를 더 나답게 만드는 새로운 방법일 것이다.
뒤섞다
진정한 지속 가능한 경제 성장은 새로운 자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존 자원을 재배치하여 더 가치 있게 만드는 데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시각성의 성배는 발견성, 즉 구글이 웹을 검색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모든 영화의 도서관을 검색하여 그 깊숙한 곳에 있는 특정한 무언가를 찾아내는 능력이다. 우리는 키워드를 입력하거나 단순히 '자전거와 개'라고 말하면, 개와 자전가가 나오는 모든 영화 장면을 검색할 수 있기를 원한다.
활동사진을 만들고, 저장하고, 주석을 달고, 조합하여 복잡한 이야기를 구성하기가 점점 쉬워짐에 따라, 대중이 재조작하기도 더 쉬워지고 있다. 그 결과 이미지는 단어와 비슷한 유동성을 띤다. 유동성을 띤 이미지는 뉴미디어로 이주하고 기존 미디어로 스며들 준비를 한 채로 새로운 화면으로 빠르게 흘러간다. 알파벳 비틀처럼, 활동사진도 검색 엔진과 데이터베이스에 정확하게 늘어놓거나 링크로 압출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유연한 이미지는 텍스트에서와 똑같이 창작과 소비 양쪽으로 흡족함을 주는 참여를 유도한다.
뒤섞기는 전통전족 재산권과 소유권 개념에 혼란을 일으킨다... 디지털 비트는 무형적이고 비경쟁적임이 널리 알려져 있다. 비트는 부동산보다 관념에 더 가깝다... 그가 당신에게 어떤 아이디어를 준다면, 당신은 그 아이디어를 지니고 그도 여전히 그 아이디어를 지닐 것이다. 그 기이함이야 말로 오늘날 지적 재산권이 불확실한 처지에 놓이게 된 근원이다.
우리 법 체계의 대부분은 여전히 농경 원리에 토대를 두고 있다. 재산권이 실재한다고 보는 체계다. 법 체계는 디지털 시대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소유가 덜 중요한 세상에서 소유권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정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 전체는 물질을 떠나 무형의 비트로 넘어가는 중이다. 소유에서 접근으로 옮겨가고 있다. 복제물의 가치에서 망의 가치 쪽으로 추가 기울어지고 있다. 끊임없고 가차 없고 점증하는 뒤섞기의 불가피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법은 느릿느릿 따라갈 테지만 결국은 따라갈 것이다.
'변형'은 되어가기의 다른 이름이다. 변형은 강력한 시험대 역할을 한다. '변형'은 현재 우리가 만드는 창작물이 내일 다른 무언가가 될 것이고, 되어야 한다고 인정한다. 손대지 않고 달라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앞으로 30년 안에, 가장 많은 뒤섞기가 일어난 것들이 가장 중요한 문화 작품과 가장 강력한 매체가 될 것이다.
상호작용하다
우리와 우리의 인공물 사이의 상호작용이 증가함으로써 나타나는 한 가지 결과는 육화한 인공물을 찬미하는 태도다. 더 상호작용을 하는 것일수록, 더 아름답게 느껴지고 보여야 한다.
상호작용할 수 있는 사물은 우리의 상호작용적 사회에서 점점 더 가치가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높은 상호작용성에는 한 가지 대가가 따른다. 상호작용을 하려면 솜씨, 조정, 경험, 교육이 필요하다. 상호작용하기는 기술에 내장되는 한편으로 우리 스스로 함양해야 한다. 우리가 상호작용을 하는 새로운 방식을 이제야 겨우 창안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다. 기술의 미래는 대체로 새로운 상호작용의 발견에 달려 있다. 앞으로 30년 안에, 강하게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 것은 고장 났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추적하다
자기 추적하기라는 새로운 시대에는 N=1실험에서 자기기만 중 일부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들이 있다. 자동측정이 이루어지고 실험 대상자의 주의를 흩어 놓도록 많은 변수를 동시에 추적할 수 있고 따라서 나중에 그 통계적 수단을 써서 패턴을 찾아낼 수 있다는 점이 바로 그렇다.
해마다 수집되는 정보의 비율이 증가하는 이유는 그 정보에 관한 정보를 우리가 생성하기 때문이다. 이를 메타정보라고 한다.
비트가 다른 비트와 연결될 때 그 가치는 증가하므로, 메타데이터는 새로운 부의 원천이 된다. 비트의 입장에서 가장 덜 생산적인 삶은 벌거벗은 채 홀로 남아 있는 것이다. 복제되지도 공유되지도 다른 비트와 연결되지도 않은 비트는 단명할 것이다.
다른 비트와 연관된 비트는 더 자주 복제되는 경향을 보일 것이다. 이기적 유전자가 복제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비트도 그렇다. 그리고 유전자가 자신의 복제를 도와줄 몸을 만들 암호를 지니고 '싶어'하는 것처럼, 이기적 비트도 자신의 복제와 전파를 도와줄 시스템을 '원한다'. 비트는 마치 번식하고 움직이고 공유되기를 원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당신이 무언가를 위해 비트에 의존한다면 지금이 비트를 알기에 좋은 때다.
유비쿼터스 감시는 불가피하다. 우리는 시스템이 추적하는 것을 중단 시킬수 없으므로, 그 관계를 더 대칭적으로 만드는 수밖에 없다. 공동 감시를 교화하면 된다. 이것을 '투명 사회'라고 한다.
나는 스노든의 내부 고발에 찬사를 보내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추적하기가 줄어들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더 투명해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재의 소셜 미디어가 종으로서의 우리 자신에 관해 무언가 가르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공유하려는 욕구가 사생활을 지키려는 욕구를 압도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2020년이 되면 한 해에 520억 개의 감지기를 만들고 있을 것이다. 전 세계에 걸쳐 우리의 차량에 내장되고 온몸에 드리워지고 가정과 거리에서 우리를 지켜볼 이 감지기의 망은 그 뒤로 10년 안에 다시 300질리언바이트의 데이터를 생성할 것이다. 이 비트 각각은 다시 두 배나 많은 메타비트를 생성할 것이다. 그리고 실용주의적 AI를 통해 추적되고 분석되고 인지화한 이 정보 원자의 드 넓은 바다로부터 수백 가지의 새로운 형태, 새로운 제품, 혁신적인 서비스가 나올 수 있다. 우리는 새로운 차원의 자기 추적하기를 통해 무엇이 가능한지를 알고 놀라게 될 것이다.
질문하다
시간 낭비를 창의성의 필수 전제조건이라고 한다. 더 중요한 점은 내가 놀이와 일, 진지한 생각과 장난스러운 생각의 융합을 이 새로운 발명이 이룬 가장 위대한 일 중 하나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사진을 비롯한 데이터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보다 공유하는 것이 더 낫다고 확신할 때, 그런 가정은 공동의 자산을 훨씬 더 급진적으로 받아들일 플랫폼 될 것이다. 한 때 불가능해 보인 것이 이제는 당연시된다.
내가 아는 한, 현재 실현되고 있는 불가능한 것은 모두 예전에 없던 새로운 조직환 수준에서 출현하고 있다. 이 믿어지지 않는 분출은 애규모 협업과 대규모의 실시간 사회적 상호작용의 산물이며, 그런 협업과 상호작용은 수십억 명이 행성 규모에서 어디에서든 즉시 연결될 수 있기에 가능해진다.
세계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비교적 단순한 해킹으로도 연쇄적인 장애가 일어날 수 있고, 그 장애는 매우 빠르게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규모로 확대될 수도 있다. 우리 사회 조직에 세계적인 교란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피하다.
집단적으로 추적되는 삶의 장면이 늘어남에 따라 증가하는 있을 법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한 가지 꿈같은 특성이 있다. 확실성 자체가 더 이상 예전 같은 확실함을 지니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모든 지식의 화면에, 10억 개의 거울 조각에 비춰진 모습을 하나로 엮은 10억 개의 눈이 달린 인류의 벌집에 접속할 때, 진리를 찾기는 더 어려워 진다. 나는 받아들여진 지식 하나를 접할 때마다 그 사실에 도전하는 견해도 쉽게 접하게 된다. 모든 사실에는 반사실이 있다. 인터넷에 극도로 난무하는 하이퍼링크는 사실만큼 반사실도 눈에 띄게 강조할 것이다 반사실 중에는 어리석은 것도, 이도 저도 아닌 것도, 얼마간 타당한 것도 있다. 이것은 화면의 저주다. 모든 전문가마다 대등한 반전문가가 있기 때문에 전문가에 의지해서는 옳은지 그른지 분류할 수가 없다. 따라서 내가 배우는 모든 것은 이 유비쿼터스 반요소들을 통해 침식된다.
따라서 즉시 지구적인 연결이 이루어지는 이 시대에, 역설적으로 내가 무언가를 확신하는 태도는 약해져왔다. 나는 권위자로부터 진리를 받아들이기 보다, 웹에서 흐르는 사실의 유동적 스트림으로 부터 스스로 확실성을 취합해야 하는 상황으로 전락해 있다. 단 하나였던 진리는 복수형인 진리가 된다. 나는 내가 관심을 갖는 것만이 아니라, 직접적인 지식을 지닐 수가 없는 분야를 포함하여 내가 접하는 모든 것에 관해 진리 여부를 재검토해야 한다. 이는 일반적으로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는 이 상태가 과학의 발전에 이상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잘못된 이유로 내 생각이 바뀔 가능성이 더 높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망들의 망에 걸려 있을 때, 나는 자신이 신뢰할 수 없는 것들로부터 신뢰할 수 있는 것을 건져내려 애쓰는 망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흐름 속에 흩어진 절반의 진리, 비진리, 일부 고상한 진리로부터 진리를 취합하려 노력하면서, 나는 유동적인 사고방식(시나리오, 그 순간의 믿음, 주관적인 직감)과 매시업, 트위터, 검색 같은 유동적인 매체 더 끌리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이 모호한 생각의 그물 속을 흐를 때, 마치 백일몽을 꾸는 듯이 느껴지기도 한다.
과학의 역설은 답이 하나 나올 때마다 적어도 두 가지의 새로운 질문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도구, 답, 질문은 계속 늘어난다.
우리 지식이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고 있다고 해도, 질문은 훨씬 더 빨리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고 있다. 이 두 기하급수 곡선 사이의 간격 자체도 기하급수적 곡선을 그리면서 넓어지고 있다. 질문과 답 사이의 이 간격이 바로 우리의 무지이며, 그거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다시 말해, 과학은 주로 우리의 지식보다는 우리의 무지를 늘리는 방법이다. 이 추세가 미래에 뒤집힐 것이라고 예상할 이유는 전혀 없다. 기술이나 도구가 더 파괴적일수록, 그것이 낳을 질문도 더 파괴적이다. 우리는 인공지능, 유전자 조작, 양자 컴퓨팅 같은 미래 기술이 새로운 엄청난 질문을 쏟아낼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우리가 예전에는 물을 생각조차 못한 질문을 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터클라우드, 기계, AI는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별하는 법을 터득할 것이다. 처음에는 애매한 부분을 명확히 하기 위해 우리가 대화에 참여할 필요가 있겠지만, 우리와 달리 답하는 기계는 주저하지 않고 어떤 주제에든 간에 심오하고 모호하고 복잡한 사실 지식을 제공할 것이다. 그런 것이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신뢰할 수 있는 즉각적인 답이 일으키는 주된 효과는 흡족함이 아니다. 풍부한 답은 그저 더 많은 질문을 생성할 뿐이다. 내 경험상 질문하기가 더 쉽고 답이 더 유용할수록, 질문은 더 많아진다. 응답 기계는 답을 무한정 확장할 수 있는 반면, 다음 질문을 구상하는 데 걸리느 우리의 시간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 좋은 질문을 생성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답을 흡수하는 데 필요한 시간 사이에는 비대칭성이 있다. 답은 저렴해지고 질문은 가치가 높아진다. 이제 상황이 역전된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점은 초 영리한 유비쿼터스 답의 세계가 완벽한 질문을 탐색하도록 부추긴다는 것이다. 완벽한 답을 만든는 것은 무엇일까? 역설적으로 최고의 질문은 답으로 이어지는 질문이 아니다. 답은 더 저렴해지고 풍족해지는 길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질문이야말로 좋은 답 100만 가지의 가치가 있다.
우리 사회는 계층 구조의 엄격한 질서로부터 탈중심화의 유동성으로 나아가고 있다.
답을 내놓는 기술은 여전히 필수적인 것으로 남아 있을 것이고, 그에 따라 답은 어디에나 있고, 즉각적이고, 신뢰할 수 있고, 거의 무료가 될 것이다. 그에 반해 질문을 생성하는 기술이야말로 더욱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그에 반해 질문을 생성하는 기술이야말로 더욱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시작하기
부드러운 특이점은 실현 가능성이 더 높다. 이 미래 시나리오에서 AI는 우리를 노예로 삼을 만큼 영리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AI와 로봇과 걸러내기와 추적하기와 내가 이 책에서 개괄한 모든 기술은 수렴하며 우리는 함께 복잡한 상호의존을 향해 나아간다. 이 수준에서 많은 현상은 우리의 현재 삶보다 더 큰 규모에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규모에서 일어난다. 그때가 바로 특이점이다. 그 특이점은 우리가 만든 것이 우리를 더 나은 인류로 만드는 새로운 체제, 또 우리가 만든 것들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의미한다. 우리가 단단한 얼음 속에서 살아왔다면, 이 세계는 액체다. 즉 새로운 상태다.
우리는 30년 안에 어떤 것들이 우리를 에워쌀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그것들은 개별적인 변화와 운의 흐름이 어떻게 교차할지에 달려 있다. 하지만 이 대규모의 약동하는과정이 전체적으로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는지는 분명하며 잘못 볼 수가 없다. 앞으로 30년 동안에도 홀로스는 지난 30년 동안 나아온 그 방향으로 계속 나아갈 것이다. 흐르기, 공유하기, 추적하기, 접근하기, 상호작용하기, 화면 보기, 뒤섞기, 걸러내기, 인지화하기, 질문하기, 되어가기를 증가 시키는 방향이다. 지금 우리는 그 시작하기가 일어나는 순간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