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인본주의를 밑바탕에 두고 말한다. 우리가 이용하는 수 많은 공짜 서비스는 사실 공짜가 아니다. 우리의 행동과 패턴을 읽고 그것을 분석함으로써 이윤을 창출한다. 우리가 기업의 서비스를 사용하는 사소한 행동이라도 기업에게는 자산이 된다. 문제는 우리가 제공한 정보에 대해서 우리가 충분히 보상받았는가 이다. 얼핏보면 우리의 정보와 기업의 서비스라는 물물교환이 문제없어 보이지만 저자가 보는 인본주의적 관점에서는 문제가 된다. 게다가 이런 거래는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부정적인 영향에 이바지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세이렌 서버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먼저 책을 읽기에 앞서 인본주의와 세이렌 서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겠다.
인본주의의 위키백과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존재를 중요시하고 인간의 능력과 성품 그리고 인간의 현재적 소망과 행복을 귀중하게 생각하는 정신이다. 인간 중심적 사고에 따른 인류 사회의 존엄, 가치를 중시한다.
세이렌 서버의 세이렌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세이렌을 말하는 것이다. 위키백과에 나오는 세이렌 설명은 다음과 같다.
세이렌은 여성의 유혹 내지는 속임수를 상징하는데, 그 이유는 섬에 선박이 가까이 다가오면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선원들을 유혹하여 바다에 뛰어드는 충동질을 일으켜 죽게 만드는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세이렌 서버는 우리를 유혹하며 이끌리도록 만들지만 결국 우리를 파멸시키는 위험한 존재로서 말한다.
저자의 주장을 모두가 이해하게 된다면 어쩌면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이후를 대표할 중요한 이념이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기업이 만든 서비스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지만 그에 맞는 적절한 대가를 받지는 못한다. 단순히 서비스를 무료로 이용하는 것은 너무 작은 대가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대가가 충분하기 위해서는 정보제공에 대한 대가를 지속적으로 개인에게 지불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치 음악을 제작하면 제작자에게 저작권을 지불 하듯이. 우리의 정보 이용을 바탕으로 이윤을 창출 했을 때 그에 맞는 보상을 정보 제공자에게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지불방법이 있겠지만 저자는 이것을 기본소득과 귀결 시킨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들은 정보가 되며 그것은 누구에게나 가치가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이다.
저자의 말에 따라 나와 같은 힘없는 개인이 지금의 경제 모델에서 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선택은 세이렌 서버에 최대한 가까이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리는 매우 한정되어 모두가 누릴 수 없는 혜택이다. 그 자리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줄어들 것이다. 우리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모델을 선택해야 한다. 소수의 사람에게 많은 부가 쏠리는 현상을 막고 중산층을 탄탄히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모두에게 가치를 부여하고 그에 맞는 혜택과 보상이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모두가 하고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자유롭고 참신하고 급진적인 삶의 징표라고 남들이 주장할 때야말로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 고민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저자의 말이 실현되었으면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를 모르고 스스로를 평가절하 한다. 어깨가 처진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가슴아프다. 그들에게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닌 그들의 가치가 타당한 혜택을 받았으면 한다. 그렇다고 단순히 연민이란 감정으로 그들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미래에 변할 산업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처롭게 싸우고 있다. 누군가 세이렌 서버에 가까이 앉으면 누군가는 밀려날 것이다. 21세기에 보면 비참한 일이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수 많은 노력들을 뒤로하고 서로 피튀기게 싸우고 있는 꼴이다. 무한 경쟁이라는 족쇄를 스스로에게 채우고 이것이 마치 발전의 원동력인양 포장되고 있다. 21세기의 지금은 존재자체가 가치있는 것이다. 우리는 정보를 화폐화 시킬 수 있는 기술과 시켜야 할 이유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해법에 쉽게 다가갈 수 없다. 이유가 무엇일까. 저자가 주장하는 경제모델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일까 인간의 탐욕 때문일까. 본인만 살아남길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살아남길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결국 자기 차례가 올 것이다.
한 시간에 한 번씩 하던 일을 멈추고 스스로를 점검해 보시길. 나는 여전히 사람들을 중심에 놓고 있는가? 모든 것의 주제는 여전히 사람인가? 사람을 부품으로 취급하고 중앙 서버를 (효율을 정의하고 효과를 검증할) 유일한 관점으로 간주하는 안이한 함정에 빠지지 마시길.
아래는 책을 읽으면서 인상깊게 느꼈던 구절들이다.
놀랍도록 많은 사람들이 놀랍도록 많은 양의 가치를 네트워크상에서 제공한다. 하지만 부의 대다수는 <원료>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 원료를 모으고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흘러든다. <정보는 공짜>라는 인식을 깨뜨리고 보편적 소액 전자 지불 시스템을 도입하면 새로운 유형의 중산층과 더 진실 되고 성장하는 정보 경제를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기계의 성능이 아무리 좋아져도 개인 자유와 자결권을 강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미래 경제를 예측하는 책이기는 하지만, 진짜 주제는 기계가 자율적 존재로 인식될 만큼 고도로 정교해졌을 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여전히 인간으로 남을 수 있을까이다. 이것을 이야기가 없는 SF라고 불러도 좋겠고 사변적 변론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내가 주장하려는 바는 우리가 디지털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세상을 재구성하는 방식이 지속 가능하지 않으며, 지속 가능성이 더 큰 대안이 적어도 하나는 있다는 것이다.
실리콘 벨리에서는 창고에서 스타트업을 시작하는 젊은이가 자신의 목표는 몇 년 안에 인류 문화를 지구적으로 또한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며 아직 돈에 대해서는 고민할 준비가 안 되었다고(뗴돈을 버는 것은 그 과정에서 저절로 얻어지는 하찮은 것이니까) 선언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다. 게다가 이 쾌활한 젊은이들은 심심찮게 성공을 거둔다. 실리콘 밸리에서는 이것이 정상이다.
이를테면 물리 버튼이 없고 터치스크린만 있는 청순하고 플라토닉한 태블릿을 설계하고 싶다고 해보자. 이렇게 하면 더 완벽하고 이상에 부합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이를테면 기기를 켜는 등의 추가적 물리 버튼이 꼭 필요하다. 절대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면에서 실패한 기술론자가 되는 것이다.
버그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수많은 나라에서 네트워크 금융을 세금으로 구제했다. 아무리 긴축해도 그 비용을 완전히 충당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기술은 조정해야 한다. 기술을 조정하고 싶어 한다는 것은 기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러니 당면한 계획을 계속 밀고 나가, 네트워크 기술이 자본주의를(더 나쁘게가 아니라) 더 좋게 바꿀 수 있는지 알아보자. 제발 우리가 따라야 할 <순수한> 형태의 자본주의가 있는 척 하지는 말라. 그런 건 없다.
애초에 나의 관심사는 단순한 물음에서 출발했다. 네트워크 기술이 모든 사람에게 그토록 좋은 것이라면, 기술이 널리 퍼진 만큼 선진국이 고통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21세기 초에 컴퓨터 네트워킹이 인간활동의 모든 분야에 파고 들자마자 모든 선진국이 일제히 경제적 고통을 격은 이유는 무엇일까? 우연의 일치였을까?
우리 시대의 보편적 조언을 하나 하자면, 정보 기술의 발전에 발맞춰 성공하고 싶은 사람들은 기술교육을 두 배로 받고 기업가 정신과 적응력을 배워야 할 것이다. 이런 능력을 갖추면, 세이렌 서버 가까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이렌 서버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하려고 계획하라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좋은 충고이다. 이것은 우리 시대에 막대한 부가 창출되는 방식이다. 하지만 우리가 행동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사회를 지탱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자리를 세이렌 서버 가까이 마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무차별적 과다 매입을 통한 엄청나게 싸고 손쉬운 담보 대출을 사랑했다. 우리는 무차별적 복제를 통한 공짜 음악을 사랑한다. 우리는 국가 정보 기관을 방불케 했을 업체가 제공하는 값싼 온라인 가격을 사랑한다. 이 새로운 감시 서비스는 우리의 안전을 위해 애쓰지 않는다. 공급 사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낮은 대가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알아내려 들 뿐이다. 우리는 일부 초월적 인공지능의 은혜를 입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장부 바깥에서 서로를 착취하는 동안 우리의 정보를 집중시키는 자들은 장부 안에서 이익을 얻는다. 우리는 별미에 혹하지만, 결국 스스로의 가치를 고갈시키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체제 안에 이토록 많은 부가 있음에도, 또한 효율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우리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것은 이런 과정에서이다. 거대한 부는 경제를 성장시킴으로써가 아니라 위축시킴으로써 창출되고 있다. 이것은 어떤 사악한 음모의 결과가 아니라, 기술이 인간 없이 똑똑해지고 자립하고 있다는 환상이 어리석게도 팽창한 부산물이다.
차별적 가격 책정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오로지 적나라하기 때문이다. 차별적 가격 책정이 실제로는 드문 일이더라도, 요점은 세이렌 서버를 상대하는 일반인이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맥락을 알기 힘들다는 것이다. 차별적 가격 책정이 아니더라도, 정보 비대칭을 활용하기 위한 다른 전략이 등장할 것이다. 그게 정보 비대칭의 존재 이유이니까.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진정 하나라도 있을까? 21세기 초에 금융이 네트워크에 열광한 과정은 실은 1930년대 대공황 직전이나 19세기 말 도금 시대의 경제적 혼란기에 일어난 일을 되풀이한 것에 불과했다. 어쩌면 세이렌 서버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경제 활동의 효율을 높였을 때 장기적으로 모두에게 기회가 증가할 것이라 예상하는 것은 틀림없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방정식의 좌변인 가격인하와 우변인 일자리 감소는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이 경우는 너무 명백하기에 언급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지만 풍요말고는 아무것도 겪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 진실을 전달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여러분에게 먹고살기에 충분한 재산이 이미 있다면 구매에서 돈을 얼마간 아끼는 것은 괜찮은 혜택이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면, 또는 그 수준에 있다가 밀려났다면 돈을 아끼는 것은 돈을 버는 것과 동의어가 아니다. 절약은 근근이 벌어가는 하루하루 산술의 일부가 된다. 직접적 전망이 없으면 절약해서 돈을 모으는 것은 불가능 하다.
'일자리가 적어지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사람들이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여행 갈때, 기존 호텔에서 가격 흥정을 하는 게 아니라 낯선 사람의 소파에서 신세 질 수 도 있잖아!' 이런 주장은 예나 지금이나 틀렸다. 아무리 비용이 줄어도 좋은 일자리가 줄면 경제적 존엄성이 커지지 않는다.
핵심적인 물음은 <얼마나 많은 것이 자동화될까?>가 아니다. 어느 시점에든 자동화 될 수 <없는> 것을 하나라도 상상할 수 있을까이다. 자동화를 뒷받침하기 위해 사람들이 할 일이 새로 생길 수 는 있겠지만, 여기에 반인간적 가치를 적용하면 이 일은 <진짜 일>이 아닌 것으로 전락할 수 있다. 어쩌면 사람들에게 기대되는 것은 (진짜 일이 아니라) <나눔>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올바른 물음은 <우리가 자동화에 대해 잘못 생각하면 얼마나 많은 일자리가 자동화로 사라질 것인가?>이다.
1930년대 대공황 시절에 대중 언론의 상투적 표현 중 하나는 어떤 일자리가 생겨도 로봇이 족족 빼앗으리라는 것이었다. 로봇이 제작자를 죽이거나 권투 경기에서 인간 챔피엔에게 도전하는 이야기가 유행했다. 요즘 들어 이 오래된 피해망상을 다시 끄집어내는 이유는 걱정할 것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이것 봐. 오래전에는 기술 때문에 사람이 쓸모없어질까 봐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요즘의 비슷한 우려도 어리석은 생각이야.'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대꾸한다. '우려가 당시에 잘못이었고 지금도 잘못이라는 데 전적으로 동의해. 무엇이 정말로 참이냐의 관점에서 보면 말이지. 사람들은 지금도 필요하고 앞으로도 늘 필요할 거야. 문제는 사람들이 올바른 가치를 부여 받도록 정산을 완벽하게 한 것인가라고, 인간이 한물가고 있다는 환각이 있다면, 그것은 사실 대규모 회계 부정에 대한 거야.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이 그 부정의 첫걸음을 떼는 거라고. 이제 그만둬야 해.'
사실 우리는 기술이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 모른다.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천국 같은 미래의 환상적 풍경이 지평선에서 우리를 향해 반짝인다. 그중 얼마큼이 신기루인지는 알 수 없다. 기술론자의 시나리오 중에서 일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감안하기만 해도 방법을 찾지 못할 수 있다 한계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 한계가 우리를 죽인다.
점점 똑똑해지는 인공 지능의 관념에 혹한 사람들은 미적 선택, 학생의 성적 향상, 주택 소유자나 기관의 신용 위험등에 대한 알고리즘의 평가를 신뢰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기계의 능력을 오독하고 인간으로서 우리의 능력을 왜곡하고 말 뿐이다. 우리는 기계가 수행하는 모든 작업에 대해 책임을 지고 알고리즘이 제시하는 모든 결론을 재확인해야 한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 보행 신호가 켜져 있더라도 늘 양쪽을 살펴보아야 하는 것과 같다.
테드는 흔한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개척했다. 딜레마가 생기기도 전에. 넬슨 식 체제에서는 누구나 자료를 재사용하여 재생 목록 메시엄 등의 새로운 구조를 만들 수 있다. 모 아니면 도 식의 임시변통 지적 재산권 시스템이 예측 불가능하게 간섭하는 오늘날의 <오픈> 시스템보다 유동성도 <더> 크다. 이와 동시에 사람들은 대가를 받고, 정보는 공짜는 아니되 감당할 만하다. 넬슨 식 해법은 디지털 네트워크에서 제약이나 번거로움 없이 공유하는 간단하고 예측 가능한 방법이면서도 장기적으로 중산층을 파괴하지 않는다. 이 50년 묵은 아이디어가 내 주장의 토대이다.
하지만 인본주의 정보 경제에서는 사람들이 나이가 늘면 젊을 때 세상에 기여한 가치대 대해 사용료를 받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정보 기술을 매우 도덕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올바른 데이터를 기억하니 말이다. 창조적인 사람들의 평생에 걸친 노고가 망각되고 이들이 끊임없이 출발선으로 내몰리는 것은 엄청난 불이익이다.
발전한 정보 경제에서 지속 가능한 중산층을 탐구하는 것은 올바른 종류의 위험 집단을 찾으려고 탐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골디락스 문제이다. 너무 커도 안 되고 너무 작아도 안 된다.
정보 경제 종형 곡선의 아래쪽 절반에 내몰려, 정보에서 얻는 대가보다 정보를 얻으려고 치르는 대가가 더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제안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문제는 기존의 대안과 비교해야지 추상적 유토피아와 비교해서는 안 된다. 유토피아는 본질상 또 다른 위험한 세이렌이다. 지나치게 평준화된 사회를 건설하려다가는 불가피하고 (본의 아니게) 새로운 권력 중심을 만들어 내게 된다. 혁명으로 옛 부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릴 수는 있겠지만, 도전을 허용하지 않는 공산당을 그 자리에 앉히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게다가 정치국 요원과 교활한 모략꾼과 아첨꾼들이 새로운 특권층으로 올라선다. 권력 집중에 대처하는 올바른 방법은 권력을 증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시장은 팽창할 수록 행복해진다. 시장을 현실과 더 적절하게 조율하는 방법을 고민하겠다면 이 점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시장이 정체하거나 위축되면 참가자들은 자신의 위치를 지키거나 남의 위치를 빼앗는 것이 유리하다. 제로섬 게임에서는 적대감이 더욱 팽배해진다. 남을 앞지르는 것이 게임의 전부가 되어 버린다. 시장이 팽창하면 게임은 제로섬이 아니다. 그러면 윈윈 사고방식이 합리적인 경우가 더 많아진다. 새것을 차지할 기회가 옛것을 놓고 싸울 때의 기회를 종종 능가할 것이다... 여기서 내가 주장하는 것은 시장이 팽창하지 않는다면 참가자들이 남들과의 당면한 경쟁 너머를 내다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부의 재분배나 집중을 놓고 싸우다 보면, 더 넓은 현실을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를 들여다 보는 일에 필연적으로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이 이유만을 놓고 보더라도, 21세기 첫 10년에 등장한 세이렌 서버의 부 창출 모형은 상 바보짓이다. 벤처 투자 회사가 시장을 위축시키는 투자 기회<만> 찾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광고한다면 우리는 제로섬 사고 방식을 선택하고 세상이 현실을 외면하도록 꾀는 게임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게임은 정보 기술이 더 많은 정보를 화폐화하고 제로섬이 아닌 사고방식의 잠재력을 중시하여 시장이 꾸준히 팽창하도록 하는 것이다.
뛰어난 기계 시각은 여러 재주를 부릴 수 있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이 카메라가 장착되고 인터넷에 연결된 장치의 시야에 들어오기만 하면 그가 어디에 있는지 추적할 수 있다. 이를테면 얼굴을 인식하거나 걸음걸이를 분석하여 신원을 확인한다. 도시의 공공장소에서 이런 장치의 시야에 포착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례적인 일이 될 것이다. 기계 사각은 어마어마한 소름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모든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항상 아는 능력을 정부가 가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전쟁이 벌어졌고 얼마나 많은 목숨이 희생되었던가? 그럼에도 지금은, 어떤 문화적 추세 때문에 우리는 캘리포니아 몇몇 기업에 바로 이 능력을 부여 하고도 희희낙락 한다. 호주머니가 두둑한 어떤 자들이 여기에 편승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망자에 대해 하는 일을 판단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죽은 사람에게 생명을 불어넣으면 살아 있는 것에서 느끼는 차이가 감소한다는 사실을 꼭 지적해야 할 것 같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므로, 살아 있는 것의 신비감이 줄어든다.
죽음은 시장의 토대라고, 그는 설명했다. 이런 사고방식은 명백하며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나이 들고 죽어야 새로운 사람들이 자리 잡을 여지가 생긴다. 그래야 열망을 품을 수 있다. 개인이 더는 일시적 존재가 아니게 된다면 인류라는 종은 영구적이고 절대적으로 지루한 승자들의, 중세보다 못한 정체 상태에 빠질 것이다. 금권 정치는 창조성을 결정적으로 짓누를 것이다.
부자가 중산층에게 분배되기를 바라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소수의 부자만이 장수를 누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도 그런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상황을 피하자는 것이다. 오래전에 마빈 민스키와 아침을 먹으면서 인공 심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는 생명 연장의 비용이 매우 저렴해져서 아무나 혜택을 볼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보았듯 어떤 것이 매우 값싸지면 다른 것이 매우 값지싸진다. 프린터는 엄청나게 싸지만 프린터에 들어가는 잉크는 엄청나게 비싸다. 휴대폰은 싸지만 통신비는 말도 안 되게 비싸다. 월마트는 싸지만 일자리가 사라진다. 소프트웨어는 <공짜>이지만 인터넷은 만드는 일자리보다 없애는 일자리가 더 많다.
대답되지 않은 물음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나의 우주 엘리베이터 피치는 발전한 정보 경제에서 정부의 한계를 어디까지 정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정보 경제가 나라마다 다를 것 인지, 지구적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지도 고려하지 않았다. 이를 비롯한 많은 거창한 물음들은 아직은 답할 수 없다. 당면 목표는 아직 탐구하지 않은 타당한 가능성이 존재함을 입증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결정론적 정보 기술 발전에 대한 현재의 광신에 얽매일 이유가 없음을, 나의 피치가 여러분을 설득했기를 바란다. 가능한 미래에 대한 나의 스케치가 젊고 유능한 전산학자와 경제학자를 자극하여 더 나은 실력을 입증하고 개선된 디자인을 내놓도록 했으면 좋겠다. 부디 그렇게 해주시리라. 하지만 한 시간에 한 번씩 하던 일을 멈추고 스스로를 점검해 보시길. 나는 여전히 사람들을 중심에 놓고 있는가? 모든 것의 주제는 여전히 사람인가? 사람을 부품으로 취급하고 중앙 서버를 (효율을 정의하고 효과를 검증할) 유일한 관점으로 간주하는 안이한 함정에 빠지지 마시길.
살면서 적어도 한 번은 사회적 압력에 저항하는 경험을 해보아야 한다. 주위의 모든 사람이 여러분에게 <순응하지 않으면 쫓겨나고 뒤처질 것>이라고 주장할 때,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경험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두 배로 까다로울 수 있다. 사람들은 순응을 이야기할 때 마치 그것이 순응에 대한 일종의 저항인 것처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하고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자유롭고 참신하고 급진적인 삶의 징표라고 남들이 주장할 때야말로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 고민해야 한다. 이것이 정말 힘들더라도 놀라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