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은 책이라고 한다. 작가 특유의 은유와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가지고 있는 많은 고뇌가 다양한 감정으로 담겨있는 책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로 오면서 그 특유의 감성을 미처 담지 못하고 온 듯 싶다. 번역에 대한 아쉬움이 너무 크다. 영어체로 직역한 듯한 문장이 있을 때 마다 내용을 쉽게 이해 할 수 없어 집중하기 힘들었고 책장을 넘기다가 작가만의 감각이 느껴졌을 글들이 얼핏얼핏 보였을 때 더욱 아쉬움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번역이라는 장벽에 우리나라 문학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힘든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책 마지막 부분에 있는 '옮긴이의 말'을 보고서는 옮긴이가 살짝 얄밉게 느껴졌다. 이 책을 영문으로 저자의 감정을 온전하게 혼자 느낀것만 같아서다. 다른 한편으로는 옮긴이가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들과 내용들을 '옮긴이의 말'에서 함축적으로 잘 표현 하였기에 얄밉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이 아쉬움은 주관적인 나의 생각이다. 옮긴이의 경력으로 보아 많은 경험과 고민 속에서 번역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번역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남은 채로 책장을 덮었기에 투덜거림으로 책 리뷰를 시작해보았다.
글을 읽다보면 저자가 백신접종을 옹호하는지 아닌지 알기 힘들다. 그것은 아마 저자가 다양한 관점에서 백신을 바라보고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특히 서로 다른 관점, 그러니까 보통의 어머니들과 다르지 않은 아이의 어머니로서 관점과 막연한 믿음에 대해 의심하고 의문을 품은 저널리스트의 관점이 서로 상충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현대의 어머니로서 백신은 무언가 못미덥게 느껴진다. 하지만 저널리스트 관점에서 이 믿음이 과연 합리적이고 근거가 타당한지 의심하고 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어머니의 관점. 아이를 자연분만 하다가 목숨이 위험한 순간까지 갔던 환자의 관점, 의사인 아버지와 주변 사람들속에서 들여다 보는 관점. 많은 서적과 신화, 드라큘라 같은 이야기속에서 보는 관점. 전문가들과 그들의 자료속에서 보는 관점. 이러한 다양한 관점은 면역이란 주제를 다각도에서 볼 수 있게 해준다.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아이를 위한 결정의 갈림길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보고 있을 때면 그녀가 다른 어머니들과 다르지 않게 고민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아이를 걱정하는 모습에서 어느 어머니들과 다름 없어 보이는 저자가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저널리스트로서 개인이 가진 의문들을 끝까지 파악하려는 탐사 정신이 보인다. 이것들은 저자의 경험과 결합되어 책 속에서 많은 이야기들을 흩뿌린다.
최근에 백신접종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하여 백신접종을 꺼리는 사람들이 늘고 이로인해 아이에게도 백신접종을 하지 않는 현상이 늘어나고 있다. 저자도 같은 고민을 했다. 백신 접종이 좋은지 아닌지. 다양한 관점에서 봐라봤던 저자는 이러한 고민속에서 하나의 의견에 다가간다. 그리고 저자는 어찌보면 이런 진부한 논쟁속에서 우리가 잊고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를 여러 관점에서 꺼낸다. 그것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면역은 사적인 계좌인 동시에 공동의 신탁이다.
집단의 면역에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웃들에게 건강을 빚지고 있다.
예전과 달리 최근에는 소득이 높은 가정에서 백신 접종을 피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흐름과 맞물려 예전에는 거의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홍역과 백일해같은 질병이 폭발적으로 늘었다고 한다. 질병이 차츰 사라져서 개인의 일상에서는 질병을 느끼지 못할 때 우리가 아무 의심없이 수용하던 백신을 의심하게 되었다. 하루에도 수 많은 정보들이 생산되는 세상속에서 검증되지 않은, 심지어 거짓된 정보들이 함께 있는 곳에서 알게되는 정보들은 우리의 두려움을 쉽게 자극하여 아무런 의심도 없이 믿게 만든다. 또한 과장해서 느낀다. 이러한 현상속에서 백신에 대한 의심과 거짓된 정보, 잘못된 믿음들이 백신을 두려워하는 톱니바퀴를 형성하면서 백신을 배척하는 엔진이 되었다. 백신에 대한 거부감은 두려움에서 피상적으로 피어난 검증되지 않은 막연한 믿음을 품었다.
백신을 선택하지 않는 것은 개인의 자유에 입각한 행위지만 이러한 행위가 낳는 결과는 개인이 속한 집단을 위태롭게 만든다. 결국 개인도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다. 백신을 접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서 일정 수준 이하로 접종하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 백신이 효력을 발휘하는 임계점을 지나 우리는 모두 바이러스 위험에 노출될 것이다. 이때가 되면 접종을 했든 안했든 어떤 방식으로든지 모든 사람들이 위험에 노출된다.
'면역은 우리가 함께 가꾸는 정원이다' 라는 마지막 장의 제목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이 책은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우리가 항상 당연시해왔던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다시 상기시켜 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도움을 받는다. 그 도움에는 우리가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들도 많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당연시 해왔던 것들은 당연하지 않으며 필수적이다. 우리는 개인으로서 완벽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서로가 더욱 필요하다.
우리가 사회적 몸을 무엇으로 여기기로 선택하든, 우리는 늘 서로의 환경이다.
면역은 공유된 공간이다.
우리가 함께 가꾸는 정원이다.
이 책을 읽고나서 지방의 역설을 읽고나서 들었던 같은 의문이 들었다. 그것은 우리가 알게된 정보를 어떻게 한 개인이 검증할 수 있느냐는 것과 검증하지 못하면 어떤 것을 믿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이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다. 검증의 영역은 한 개인에게 불가능하다고 느껴진다. 한 개인에게는 그저 기호의 문제가 될 뿐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이 책의 저자가 말한 힘을 부여받은 무력함의 상태를 느낀다. 나는 많은 정보라는 힘을 얻었지만 그것이 너무 많은 것과 결합되고 연결되어 부여받은 힘으로는 어떤 것도 통제할 수 없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믿음의 문제는 어떠한가.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결정을 할 때면 합리적이기 보다는 나의 경험과 나와 가까운 주변 상황들에서 그 정보를 믿을지 말지를 결정한다. 역설적이게도 합리적인 정보를 가지고 대립되는 믿음 속에서 하나의 믿음을 선택하려고 하면 비합리적인 요소들로 믿을지 말지를 결정한다. 사람들은 대게 여기서 자신은 매우 합리적인 결정을 했다고 착각한다. 어쨌든 나는 여기서 혼란을 느낀다. 합리적이라 생각했던 결정이 마치 동전 던지기를 해서 앞면이 나오면 믿고 뒷면이 나오면 믿지 않는 방법과 다를바 없다고 생각되지 때문이다. 이런 생각에 도달했다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내가 틀릴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성과 감성이 서로 공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때로는 하모니를 이루고 때로는 대립하며 마치 내안의 또 다른 세상이 있는 것을 말이다.
대립되는 논란 속에서 다수가 믿는 믿음과 소수가 믿는 믿음이 있다. 하지만 단순히 믿음의 양으로 믿음을 정할 수 없다. 다수가 믿었던 믿음은 미래에는 거짓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사와 과거가 증명해준다.
아래의 내용은 책에서 인상 깊었던 구절들을 모은 것이다.
우리는 집단을 어리석은 것으로 여긴다. 군중 심리를 꺼리는 사람들은 그보다는 개척자 심리를 선호하는데, 우리 몸을 독립된 농장으로 상상하고서 개개인마다 그것을 잘 가꾸거나 잘못 가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는, 우리가 제 농장을 잘 가꾸는 한, 이웃한 농장의 건강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어느 한 사람이 발견의 공을 주장할 수 있는게 아니었다. 서로위키가 상기시키듯이, 과학은 <대단히 집단적인 사업이다>. 그것은 집단의 생산물이다.
우리는 몸을 갖고 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라도 동시에 위험한 존재들이다. 우리 시대가 철저히 취약한 존재로 여기도록 부추기는 아이들의 작은 몸도, 사실은 질병을 퍼뜨릴 능력이 있기 때문에 위험한 존재이기도 하다. 샌디에이고의 미접종 소년 사건을 떠올려보라. 2008년에 스위스로 여행 갔다가 홍역에 걸려 돌아온 소년은 자신의 두 형제, 학교 친구 다섯, 소아과 대기실에서 만난 아이 넷을 감염시켰다. 감염되 아이들 중 셋은 너무 어려서 백신을 맞을 수 없는 영아였고, 그 중 한 명은 입원해야 했다.
백신 미접종 아이들은 주로 백인이고, 대학 교육을 받았으며 비교적 나이가 많은 기혼의 어머니를 두었고, 소득이 7만 5천달러 이상인 가정에서 사는 경우가 많다.
"백신은 다수 집단을 동원해서 소수 집단을 보호함으로써 효과를 발휘하지" 아버지의 설명이다.
이것은 한 때 특권층 의 이익을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육체적 예속을 끌어내는 행위 였던 백신 접종의 옛 적용 방식을 완전히 뒤집는 셈이다.
역사학자 마이클 윌리히는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를 해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들은 오히려 겁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운전을 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한다. 술을 마시고, 자전거를 타고, 너무 오래 앉아 있는다. 그러면서 오히려 통계적으로 따져서 별달리 위험하지 않은 것들을 걱정한다. 우리는 상어를 무서워하지만, 순 사망자 수로 따지자면 지구에서 제일 위험한 생물은 모기일 것이다.
위험 인식은 계량 가능한 위험에 관한 문제이기보다 측정 불가능한 두려움에 관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두려움은 역사와 경제, 사회적 힘과 낙인, 신화와 악몽의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가 강하게 품는 여느 믿음처럼, 우리의 두려움은 우리에게 소중하다. 슬로빅이 실험에서 확인했던 경우처럼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을 반박하는 정보를 접할때, 우리는 자신이 아니라 정보를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중요한 건 사람들이 사실을 올바로 알고 있는지 아닌지가 아니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는지 아닌지 일지도 모른다.
사소한 위험에는 지나치게 많은 관심을 쏟으면서 중대한 위협에는 지나치게 적은 관심을 쏟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론가 이브 세지윅이 말했듯이, 편집증은 전염성이 있다. 세지윅은 편집증을 <강력한 이론>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다른 사고방식을 죄다 몰아내는 폭넓고 환원적인 이론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편집증은 아주 자주 높은 지능으로 통한다.
오염에 대한 두려움은, 다른 문화들처럼 우리 문화에도 널리 퍼진 믿음, 즉 무언가가 접촉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것의 성질을 옮길 수 있다는 믿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우리는 오염 물질과 접촉함으로써 우리가 영원히 오염된다고 여긴다. 그리고 우리가 제일 두려워하게 된 오염 물질은 바로 우리가 직접 만들어낸 제품들이다. 독성학자들은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지만, 많은 사람은 인공 확학 물질보다 천연 화학물질이 본질적으로 덜 해롭다고 여긴다. 그렇지 않다는 온갖 증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연이 전적으로 선하다고 믿는 듯하다.
대체 의학의 매력 중 하나는 그것이 대안 철학이나 대안 치료법뿐 아니라 대안 언어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오염되었다고 느끼면, 대체 의학은 <정화>를 제공한다. 우리가 부적절하고 부족하다고 느끼면, 대체 의학은 <보충제>를 제공한다. 우리가 독소를 두려워하면, 대체 의학은 <해독(디톡스)>을 제공한다. 우리가 나이 들어 몸이 녹슬고 산화하고 있다고 걱정하면, 대체 의학은 <항산화제>로 안심시킨다. 이런 은유들은 우리의 근본적인 불안을 달랜다. 그리고 대체 의학 언어가 잘 이해하듯이, 우리는 기분이 나쁠 때 뭔가 절대적으로 좋은 걸 바라기 마련이다.
우리가 바라는게 위안일때, 대체 의학이 제공하는 가장 강력한 강장제는 천연natural이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인간의 한계에 좌우되지 않는 의학, 전적으로 자연이나 신이나 그도 아니면 지적 설계에 의해 마련된 의학을 암시한다. 자연이라는 단어는 의학의 맥락에서 순수함, 안전함, 무해함을 뜻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연을 좋음의 동의어로 쓰는 태도는 우리가 자연으로 부터 심하게 괴리된 결과인게 거의 분명하다.
요즘 어떤 부모들은 아이가 백신없이 <자연적으로>감염성 질병에 대한 면역을 발달시키도록 만든다는 발상에 매력을 느낀다. 그 매력은 백신이 본질적으로 부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믿음에 의지한 바가 크다. 그러나 백신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중간적 장소에 속하는 물질이다... 백신 접종 후 면역을 생성하는 항체들은 공장이 아니라 인체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가끔은 백신 접종을 둘러싼 갈등을 묘사할 때 어머니들과 의사들의 <전쟁>이라는 은유가 쓰이기도 한다. 은유를 쓰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교전하는 양측은 무지한 어머니들과 교육받은 의사들, 직관적인 어머니들과 지성적인 의사들, 염려하는 어머니들과 무정한 의사들, 비합리적인 어머니들과 합리적인 의사들로 그려진다. 성차별적인 고정 관념들이 넘친다.
백신은 아기의 면역계를 개인 지도하는 선생으로, 면역계로 하여금 아직 만나지 못한 병원체들을 기억하도록 가르친다. 백신을 맞든 안 맞든, 아기의 생후 첫 몇년은 면역 속성 교육 기간이다. 그 몇년 동안 아기가 흘리는 수많은 콧물과 아기가 겪는 수많은 열은 면역계가 세균 어휘집을 공부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 강의에서 떠오른 하나의 서사란 게 있다면, 그것은 면역계와 그것이 공진화하는 병원체들이 상호 작용을 벌이는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는 가끔 진행 중인 싸움으로 묘사되곤 하지만, 그렇더라도 아파치 헬리콥터와 무인 드론이 동원되는 싸움은 아니다. 그것은 그보다 재치를 겨루는 싸움이다. '그러자 바이러스는 그보다 더 똑똑해져서, 천재적인 꾀를 냈습니다. 우리 전략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맞선 겁니다' 교수는 이런식으로 말했다. 그의 이야기에서, 우리 몸과 바이러스는 치명적인 체스 게임에 푹 빠져서 서로 겨루는 두 지성이었다.
웨이크 필드는 이미 백신이 안전하지 않다고 믿고 있던 부모들의 의혹을 지지했다. 그의 논문은 MMR 백신이 자폐증상을 포함하는 행동 증후군과 관계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한 내용이었다. 논문이 널리 보도되자 홍역 백신 접종률이 뚝 떨어졌지만, 사실 논문의 결론은 <우리는 홍역, 볼거리, 풍진 백신과 앞서 말한 증후군 사이의 연관성을 증명하지는 못했다>라는 거였으며 논문의 주된 발견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거였다.
백신 제조업체들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던 한 변호사가 웨이크 필드에게 연구에 대한 대가를 지급했다는 사실을 한 탐사 저널리스트가 밝혀냈다. 그리고 2007년, 영국 국가 의료 심의회는 웨이크필드의 의료 윤리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여 그의 처신이 <무책임하고 부정직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확정적이지 못한 웨이크필드의 연구를 가져다가 백신이 자폐증을 일으킨다는 가설을 지지하는 데 썼던 사람들의 죄는 무지냐 과학 부정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전부터 우리가 허술한 과학을 이용해 왔던 방식대로, 즉 다른 이유에서 사실이라고 믿고 싶은 생각에 거짓 신뢰성을 부여하려는 용도로 과학을 이용한 죄였다.
백신 접종이 참혹한 질병을 일으킨다는 믿음은 우리가 이미 잘 아는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다시 들려주게끔 허락한다.
오물이나 세균이 아니라 독소가 대부분의 질병의 근본 원인이라는 생각은 나 같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진 질병 이론이다. 우리를 걱정시키는 독소는 농약 잔류물에서 고과당 시럽까지 다양하고, 특히나 수상한 물질로는 깡통 안쪽에 코팅된 비스페놀 A, 샴풍에든 프탈레이트, 소파나 매트리스에 처리된 염소계 인산염이 있다.
더럽혀지지 않은 몸의 낭만에 매료된 나머지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 물을 마셨을 때 괴로워했던 게 기억난다 <더러워! 더러워!> 내 마음은 외쳤다.
수은으로 말하자면, 아이가 백신 접종보다 주변 환경에서 접하는 수은이 더 많다는게 거의 늘 확실하다. 백신의 면역 반응을 강화하는 증강제로 자주 쓰이는 알루미늄도 마찬가지다. 알루미늄은 과일과 곡물을 비롯한 많은 것에 들어 있고 물론 모유에도 들어 있다. 알고 보니 모유는 전반적인 주변 환경만큼 오염되어 있는 물질이었다. 모유를 분석한 실험실에서 그 속에서 페인트 희석제, 드라이클리닝 용액, 내연제, 농약, 심지어 로켓연료를 검출해 냈다.
독성toxin라는 단어를 내연제나 파라벤의 맥락에서 듣는데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단어의 정의가 좀 놀랍게 느껴질 수도 있다. 요즘은 인공 화학 물질을 가리키는 말로 자주 쓰이지만, 이 용어 가장 정확한 의미는 여전히 생물학적으로 생성된 독성 물질을 가리키는 용도다.
순수함, 특히 신체적 순수함은 언뜻 무해한 개념으로 보이지만, 실은 지난 세기의 가장 사악한 사회 활동들 중 다수의 이면에 깔린 생각이다. 신체적 순수함에 대한 열정은 맹인, 흑인, 가난한 여자들에게 불임 시술을 실시했던 우생학 운동의 동기였다. 신체적 순수함에 대한 걱정은 노예제가 폐지된 뒤에도 한 세기 넘게 살아남았던 인종 혼합 결혼 금지법의 이면에 깔린 생각이기도 했으며, 최근에서야 위헌으로 판정된 남색 금지법의 이면에 깔린 생각이기도 했다. 모종의 상상된 순수성을 보존하려는 노력 때문에, 그동안 인류의 유대는 적잖이 희생되어 왔다.
면역은 공공의 공간이다. 그리고 면역을 지니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들도 그 공간을 점거할 수 있다. 내가 아는 어떤 어머니들에게 백신 거부는 자본주의에 대한 좀 더 폭넓은 저항의 일환이다. 그러나 시민 불복종의 한 형태로서 면역을 거부하는 건, <점거하라> 운동이 교란시키려고 애쓰는 그 구조, 1퍼센트의 특권층이 나머지 99퍼센트로부터 자원을 얻어 내면서 위험으로 부터 보호받는 구조와 심란하리만치 닮았다.
전 세계의 연구잘들 보건 관료들, 의사들로 이루어진 방대한 네트워크가 돈 때문에 아이들에게 일부러 해를 끼칠 수 있다는 발상이 아주 그럴싸하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는 건, 자본주의가 우리에게서 실제로 무엇을 빼앗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자본주의는 이미 남들을 위해서 부를 생산하는 노동자들을 가난하게 만들었다. 또한 자본주의는 시장성 없는 예술의 가치를 박탈함으로써 문화적으로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가 자본주의의 압박을 인간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본질적 법칙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모든 사람은 다 소유된 상태라고 믿기 시작할 떄, 그때야말로 우리는 진정 가난해질 것이다.
손님이 왕이라는 생각은, 의학에 도입될 경우 위험 천만한 금언이 된다. 생명 윤리학자 아서 캐플런은 이렇게 경고했다. <사람들에게 의료는 시장일 뿐이고 그들은 의뢰인일뿐이며 그들이 고객으로서 만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환자의 자율성을 제공받아야 한다고 계속 말해 준다면, 의료의 전문성은 소비자의 요구 앞에 붕괴하고 말 것이다.> 의사들은 환자들이 원하는 것을 주려는 유혹을 느낄 것이다. 그것이 설령 환자들에게 나쁘더라도.
우리는 모방을 경계한다. 그것이 개선일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백신 바이러스가 아니라 야생형 바이러스를 원한다. 그리고 아이가 진짜 수두를 경험하는 편을 선호한다 수두를 일부러 감염시키는 방법의 매력 중 하나는 그런 예방 접종이 백신 접종보다는 종두를, 즉 진짜를 더 닮은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소아 감염성 질병 전문가 앤 모스코나가 말했듯이, 19세기 종두 접종자들에게 그것은 <제 손으로 면역을 얻는>방법이었다. 오늘날 우리의 수두 막대 사탕과 돼지 독감 파티 처럼, 그것은 일종의 <자경 백신 접종>이었다.
백신으로 형성된 면역이 베푸는 자비 중 하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자신과 타인을 대단히 더 큰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면서 백신 접종을 포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수가 정확히 얼마인가는(즉, 그 문턱값을 넘어서는 순간 집단 면역이 사라져서 백신 접종자나 미접종자 모두 질병에 걸릴 위험이 극적으로 치솟는 지점이 어딘지는) 문제의 질병, 백신, 인구에 따라 달라진다. 많은 경우 우리는 그 문턱값을 넘어선 뒤에야 사후적으로 값을 알 수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양심적 거부자는 늘 전염병에 기여할 잠재력을 품은 위태로운 위치에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경제학자들이 도덕적 해이라고 부르는 상황, 즉 보험으로 보호받는 사람은 현명하지 못한 위험을 감수하는 성향이 있다는 상황에 처한셈일지도 모른다.
아들이 배꼽에 대해서 물으면 나는 한때 거의 신화적인 탯줄이 우리를 잇고 있었다고 설명해 준다. 내 배꼽을 가리키면서, 누구나 한때는 다른 몸속에 담겨 있었고 그 몸에 의지해서 살았다고 말해 준다. 세 살밖에 안 된 아들은 아직까지 내게 전적으로 의지하지만 벌써 스스로를 독립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진 터라, 이런 설명을 혼란스럽게 느낀다. 계몽 시대 직전에 저 말을 했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우리가 오늘날까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역설을 표현한 것이었다. 즉, 몸은 각자에게 속하지만 동시에 많은 몸으로 이뤄진 더 큰 몸에도 속한다는 역설 말이다. 우리는, 우리 몸은, 독립적이면서 의존적이다.
나는 임신한 뒤로 지금까지 자폐증이 가족의 주거지와 고속도로와 근접성, 산모의 항우울제 복용, 수정 시점에 아버지의 나이, 산모가 임신 중에 인플루엔자에 감염 되었는지 여부 등과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글을 숱하게 읽었다. 그러나 그 중 어느 가설도 백신과 자폐증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단 하나의 확정적이지 않은 연구에 쏟아졌던 언론의 관심만큼 많은 관심을 받진 못했다. 작가 마리아 포포바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의 미디어 문화는 과학적 이해의 씨앗을 왜곡시킴으로써 비만 유전자나 언어 유전자 혹은 동성애 유전자가 발견되었다는 선정적이고 단정적인 기사 제못으로 바꿔내고, 사랑이나 공포나 제인 오스틴을 감사하는 자질이 뇌의 어느 부위에 있는지 알려 주는 뇌 지도를 그려낸다. 과학의 원동력은 답에 매달리는 게 아닌 무지를 받아들이는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우리가 과학적 증거를 알아볼 때는, 정보 전체를 고려해야 한다. 수역 전체를 조사해야 한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방대하다면, 어느 한 사람이 하기에는 불가능한 일이 된다. 의학 한림원에 제출할 2011년 백신 부작용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서 동료 심사를 거친 논문 12,000편을 점검하는 일에는 의학 전문가 18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꼬박 2년을 들여야 했다. 그 위원회에는 연구 기법 전문가, 자가 면역 질병 전문가, 의료 윤리학자, 아동 면역 반응에 대한 권위자, 아동 신경학자, 뇌 발달 연구에 전념하는 연구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의 보고서는 백신이 비교적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물론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정보를 항해하는 데 어떤 종류의 협동이 필요한지도 보여 주었다. 우리는 혼자서는 알 수 없다.
백신의 문제는 의학의 필연적인 결함을 보여 주는 증거가 아니라 우리가 정말로 스스로를 망가뜨릴 것임을 보여 주는 증거가 되었다.
연구자들은 백신 접종자들이 품고 있는 백신에 대한 이해를 조작할 경우 그들이 편견으로 기우는 경향성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계절성 독감 백신은 사람들에게 계절성 독감 바이러스를 주입하는 작업이다> 처럼 백신을 오염의 관점에서 설명한 글을 읽혔을 때는 질병을 우려하는 사람들의 편견이 더 강화 되었지만, <계절성 독감 백신은 사람들을 계절성 독감 바이러스로부터 보호한다.> 처럼 백신을 보호의 관점에서 설명한 글을 읽혔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두 진술은 둘 다 사실이지만, 두 진술이 야기한 태도는 서로 달랐다. 연구진은 손 씻기에 관한 실험을 하나 더 수행한 뒤, 세 실험 결과에서 일관된 패턴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보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 독감 같은 육체적 질병에 대한 치료법은 편견 같은 사회적 병폐를 치료하는 데도 쓰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