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7. 00:53ㆍ책
스콧 L 제리몽고
데니얼 치롯
현대의 탄생
사상은 우리의 행동과 저변을 만든다는 주자의 주장으로 시작된다. 저자는 사상이 종종 물질적 변화보다 먼저 찾아왔다는 견해를 보인다. 그렇기에 현대를 기반하는 주요한 사상들의 출발점에 서서 안내를 시작한다. 저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표적인 사상의 출발점으로 애덤 스미스, 카를 마르크스, 찰스 다윈, 해밀턴과 제임슨이 있다.
이들은 현대의 자유 평화 민주주의에 어느 누구보다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들이 그 사상의 창시자는 아니지만 현대에 있어서 그들의 주요 사상들과 텍스트가 각각의 분야에서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력 만큼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전 보다 이런 사상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불과 한 세기전만해도 당연하다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현대에 와서도 이런 위협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아마 사라졌다 해도 우리는 언제든지 자유와 평등과 관용이라는 중요한 사상들을 잃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상의 출발점에서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상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출발점을 되돌아 봤다면 뒤에서는 이러한 사상들을 위협하는 존재와 사상들에 대해서 살펴본다. 우리가 중요시하는 사상들을 지켜내고 싶다면 그것을 위협하는 사상 역시 알아야 한다. 그것들이 무엇으로 부터 탄생했는지와 어떤 함의를 지니고 있는지 안다면 우리가 겪는 위협은 전적으로 위협 그 자체가 아닌 더 나은 세계를 위한 토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줄곧 들었던 생각은 의견을 뒷받침하는 이전의 주요 사상들에 오류가 있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을 것이고 계속해서 자신의 주장을 사람들에게 설파해 나갈 것이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내가 두려움을 갖게 된 이유는 내 입으로 주장한 내용이 틀렸을 경우 그 틀림을 받아들이기가 적잖이 힘들다는 것이다.
틀림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 이것은 매우 힘들다. 내가 들인 노력과 시간이 커질수록 인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훌륭한 사람이라면 이런 고통 가득한 선택의 기로에서 올바른 선택을 내리리라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인류는 정주행 발전이 아닌 비틀거리며 발전하는 것 처럼 보인다. 사람이라는 주체가 사상을 만들지만 결국에는 사상이 우리를 변하지 못하게 하는 올가미가 된다. 다시 말해 개인이 가지고 있는 편견과 휴리스틱이 사상의 근본 정신을 무시하고 각색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상가들의 텍스트를 그 자체로 이해하지 못하고 사상가들의 복잡하고 애매한 내용을 자신이 놓인 환경과 처지에 따라서, 그러니까 본인의 맥락에서 이해하려 하기 때문일까? 우리는 '나'라는 단일한 감각을 느끼며 나의 선택으로 오늘을 살고 있다고 느끼겠지만 실제로는 사회의 통제된 요소와 통제되지 못한 요소가 결합하여 만들어낸 산물이라 생각된다.
애덤 스미스
오늘 날에 애덤 스미스라고 하면 자본주의를 근본을 이루는 중요한 철학자로 자유시장과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문자들로 기억된다. 오늘 날 자본주의는 불평등을 야기하기에 이와 맞물려 애덤 스미스를 돈과 경제를 우선시하는 차가운 사람으로 바라볼 수 있는데 실제로 그는 도덕철학자로 국부론보다 도덕감정론을 먼저 집필하여 이를 근간으로 국부론을 집필하였다. 그는 평화적이고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서 모든 이에게 더 많은 자유와 기화가 오기를 바랬다.
'중요과 검약이라는 스토아주의적 미덕을 이용해서 모든 세력의 균형을 맞추려던 스미스의 욕망이 어떤 면에서는 고지식해 보이기까지 한다.'
현대의 경제학은 여러 이론에 따른 여러 분파로 나뉘지만 대부분이 자유시장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동의한다. 따라서 현대 경제학의 창시자인 애덤 스미스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표준 경제학에서는 정부의 간섭을 유해한 관점으로 바라본다.이것은 역사적으로도 알 수 있는데 사회주의 국가들의 결과를 보면 쉽게 이해된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은 애덤 스미스의 도덕적 철학은 저버리면서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과는 다른 종류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런 상황을 유발하게 된 이유는 경제학을 철학에서 과학으로 옮겨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과학은 도덕적, 정치적 편향에서 분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과 거리가 멀었고 이에 근거한 결과 역시 경제학자들의 예측과는 많이 달랐다.
'경제학은 한편으로는 점점 더 수학적이 됨으로써, 또 한편으로 시장을 마치(물리학이 전적으로 비인격적인 법칙에 따라 지배되는 우주를 묘사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자연법칙에 응답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별개의 힘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경제학이야말로 우월한 지식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자율 조정 시장을 숭배하는 분위기에서 불평등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현상임을 무시하게 되었다. 무조건적인 시장간섭 만큼이나 무조건적인 자유시장은 시장을 왜곡하고 불평등을 야기하는 잘못을 저지른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제이컵 바이너가 1926년의 중요한 논문에서 지적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억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애덤 스미스는 자유방임주의의 교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정부의 활동 범위를 넓고도 유연하게 바라보았으며, 만약 정부가 그 능력과 정직과 공공심을 입증함으로써 더 넓은 책임을 담당할 만한 자격이 있음을 보여줄 경우에는 그 범위를 확대할 준비도 되어 있었다."'
비교적 최근에는 애덤 스미스에 반하는 신중상주의가 나타나는데 그 이유를 동아시아의 발전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국과 일본 발전 절정기와 최근의 중국을 보면 자유방임과는 거리가 먼 보호주의적 정책을 통해서 발전을 이룩했음을 볼 수 있다.
동아시아 이전에 먼저 발전했던 선진국 사례에서도 이러한 보호주의적 시장정책 때문에 발전했다는 내용도 찾아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만 보면 마치 애덤 스미스의 자유시장에 관한 이야기가 틀린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주요한 사상은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경제학자에게 기반이 되고 있다.
저자는 이런 상황에서도 애덤 스미스의 사상이 유지되길 바라는데 그것은 그의 사상이 옳기 때문이 아닌 사상 저변에 깔려있는 요소들이 중요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애덤 스미스의 사회철학 없이 계몽주의에 대한 열망만 남게 된다면 사상의 자유와 개인의 자유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
젊은 시절 그는 그를 잘못되어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해서 불만과 불평에 집중했다. 막 태동한 민주주의와 개인주의는 그의 눈에 부르주아를 합리화 시키는 조잡한 사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잘못된 현상을 변화시키길 원했기에 변화를 막는 모든 것을 싫어했다.
결국 그는 보수적이지 않으면서 진보적인 길을 걸었으나 그 길은 보편적인 길이 아닌 그만의 투쟁의 길이었다. 귀족, 군주, 종교에 비난을 퍼부엇으며 비인간적으로 사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길 원했다.
마르크스는 일종의 에덴동산으로 인간의 착취라는 불평등과 야만으로 더럽혀지지 않은 장소를 필요로 했다.
그는 사회 변화의 주된 요인으로 경제적 요인을 집어 넣었다. 헤겔의 변증법적 역사관에 경제적 요소를 넣어서 변증법적 유물론을 만들었다.
저자는 마르크스 이론의 장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론 자체가 워낙 방대하고 또 외관상 튼튼해 보이기 때문에, 그 핵심을 내버리지 않고 유연하게 응용될 수 있는 것이다. 수십년에 걸쳐 갖가지 반대 증거가 누적되었지만, 그 지지자들은 항상 이리저리 돌파구를 찾아냄으로써 그 모든 증거가 마치 마르크스의 본래 통찰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해석을 내놓을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산업화에 따른 여러 문제들의 원인을 과잉생산이라고 믿었다. 그의 논리를 따라가면 자본주의는 몰락할 운명이라는 결과에 도착한다. 여기서 핵심은 노동자의 착취로 귀결되는 기업간의 경쟁이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사유재산의 발명으로 인해서 핵심 자원의 통제권을 둘러싼 계급 간 폭력 투쟁이 된 세계이자 역사였다. 이런 근본적 인식 때문에 자본주의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마다 마르크스 주의는 힘을 얻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그가 원하는 혁명 이후, 그러니까 부르주아를 몰아내고 착취를 없앤 세상에는 사유재산은 사라지고 산업 시대의 놀라운 발명품을 모두가 사용할 수 있으므로 모든 인간은 잠재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여기서 국가는 존재하지 않게 되며 따라서 국경도 전쟁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평화와 번영의 시대로 진입할 것이라고 믿었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부분적으로 입증되었다. 자본주의의 결함에 관한 부분이 특히 그러했기 때문에 그의 사상을 완전히 저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마르크스와 같이 현대 구조에 불만과 불평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는 공감으로써 설득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설득력과 함께 부분적으로나마 입증하게 되었다면 다른 부분은 틀리더라도 상관없어 보인다.
그를 공감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예지자이며 선구자로 보일 것이다.
그의 사상으로 부터 이룩한 세계가 지금은 실패로 보일지라도 그의 사상이 담고 있는 의미를 무시하는 것은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20세기 초 마르크스 사상으로 무장한 사회주의 세력의 성장으로 그의 예견이 실현되는 듯 보였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세력들이 마르크스가 틀렸음을 입증하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의 단결, 그리니까 계급의 단결을 예견했지만 실제로 그들이 택한 것은 국가에 단결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종족주의과 내셔널리즘을 이해하지 못했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계급보다는 소속감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에 계급의 단결의 아닌 국가에 단결을 선택했다고 보인다.
1930년대 러시아의 발전은 마르크스가 옳았음이 증명되는 것으로 보였지만 부작용을 폭력과 억압으로 제거했고 이런 비참한 사실들을 감추려 함으로써 그렇게 보였다.
마르크스를 기반으로 사회기반을 구성했던 세력들은 스스로 마르크스가 원했던 평등하고 인간적이고 더 공동체적인 사회를 향한 마르크스의 가장 깊은 희망을 버렸다. 대신 그들은 마르크스의 분노, 증오, 꿈을 위한 무력 사용의 승인만을 받아 들였다.
러시아와 중국에서 보듯이 그들은 마르크스로 시작하였지만 이제는 그를 버리거나 일부분만 사용하고 있다. 그의 사상으로 시작된 거의 모든 것들은 현재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직도 마르크스의 사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러한 원인을 레몽 아롱이 설명한다.
정의로운 복수를 위한 기독교적 논제, 불평등의 해결, 합리적인 과학처럼 보이는 매력.
이 내용을 이해하는 사람은 전문가 자격을 얻고 황금시대로 인도하게 될 것 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구원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진 지식인들에게 특히 호소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국가에서 마르크스 주의가 힘을 얻게 되는 이유가 여전히 궁금했는데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갈등과 증오와 폭력과 불확실성으로 산산 조각난 시대에 뭔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공한 '신없는 신앙'의 일종이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었다. 비록 더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종교가 필요했던 것이다.
계몽주의는 과학의 힘으로 종교의 힘을 무력화시켰다. 새로운 질서가 사회를 구성했지만 종교로 부터 이해되고 억제됬던 사회적 불만들은 다른 형식으로 분출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도덕과 윤리적인 행동은 바로 종교에서 많이 나왔는데
우리의 불만과 분노는 종교가 힘을 잃은 상황에서 억제되지 못하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 역시 이러한 방황을 했을 것이고 그 방황속에서 그는 자신만의 길을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가난한 국가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문제를 마르크스 사상의 공감에서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바로 마르크스 본인이 불만을 가졌던 상황과 그들이 놓인 상황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마르크스 사상은 위력적이다. 현재가 지니고 있는 갖가지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자극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따르려던 많은 세력들이 남긴 잔인한 유산들은 보지 못하는 것 같아 보인다.
고삐풀린 자본주의에 노조와 정부의 간섭이 없다면 불평등이 증대된다는 증거가 있다. 불평등이 증대한다면 마르크스 사상이 다시 고개를 들개 될 것이다. 그의 사상이 남긴 잔인한 유산들은 외면한 채 말이다.
하지만 그 역시 바라던 것은 평등이다. 그에 대한 해결책은 폭력에 해당하는 혁명이었기에 거부감이 있지만 만약 우리가 받는 불평등에 대한 불만의 감각이 폭력에 대한 거부감을 넘어설 경우 우린 피를 보는 것도 게이치 않아 할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 장의 마지막 장은 눈여겨 보여할 부분이다.
찰스 다윈
다윈의 진화론 사상이 서양 문화에 들어온 시기는 혁명적인 사상과 보수적인 사상이 뒤엉킨 혼란스러운 시기 였다. 전통적인 종교는 이를 다스릴 위치에 있지 않았다. 이 때 다윈의 진화론은 이 혼란에 질서를 부여할 수 있는 담론이 되었다. 다윈과 다윈주의는 모든 맥락에서 진화를 가리키는 축약어가 되었다.
'사회에 적용되었을 경우 진화는 어떤 특정 집단의 성공을 의미했다. 진화는 진보가 나아가는 뚜렷한 길이 있다는 점을, 그리고 그 길에 간섭하는 부적절한 것은 무엇이든지 제거해야 한다는 점을 입증하도록 왜곡되었다.'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했을 때 매서운 비판과 공격이 이어졌지만 1870년에 이르러 승리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 승리라는 것은 진화론으로 설명하려는 모든 것을 의미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진화론이 동식물의 무작위적 변이에 의존한 맹목적이고 무분별한 과정이었던 진화가 사회 변화를 위한 가장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야심을 정당화하기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과확계에서 만큼은 다윈의 진화론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기존 과학계가 믿은 것은 자연선택 보다는 라마르크주의 정향진화, 또는 변종이었는데, 여기서는 생명이 직선형으로 진화하는 본래적 경향을 지녔다고 주장했다.
자연선택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직관적이지도 않았던 반면 단순한 형태에서 복잡한 형태를 향한 발전은 자연계에서도 증거가 수두룩하고 화석 기록에서도 증거가 많았기 떄문이다. 자연선택이라는 우연적이고도 암중모색하는 버전의 진화론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어떤 영역에서건 다윈의 진화론을 연결시켜 결론을 끌어내는 경향이 존재했다. 이런 사람들은 다윈에게서 영감을 얻었다고 했지만 그들의 내용은 과학이라기 보다 철학과 사회 이론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다윈주의는 과학 기반이 아닌 유사과학적인 주장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사회적 다윈주의라는 쟁점을 야기한다. 사회의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이 적합하고 또 가장 잘 적응한 상태라고 주장하는 보수주의자, 따라서 사회의 나머지에게 자원을 재분배하는 조치는 자연 질서를 침해하는 셈이라고 주장하는 보수주의자들을 겨냥한다.
또 그들은 자유주의적 개혁에 반대하며 자유방임주의 경제학을 선호한다고도 평가된다. 이런 관점에서 더 나아가 우생학이라는 사상을 탄생시켰다. 우생학은 선택적 품종 개량을 인간에게 도입한 것으로 우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 더 우월한
인간 또는 인종을 만들려는 시도이다. 우생학은 20세기 초 불안한 사회현상을 겨냥하기도 했는데 범죄의 증가, 교육의 실패, 여러 차례의 경제 후퇴등을 겪으면서 나타났다.
1940년 사회운동으로 이 비극적인 사상은 끝이 났는데 유전학이 제대로 이해되면서 이기도 했지만 나치즘이 보여준 우생학의 잔인한 현상이 큰 역할을 한것으로 보인다.
우생학 시대를 통한 불편한 현실은 지능, 교육, 그리고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전망마저도 저 핵심 사상에 대한 믿음 앞에서는 아무런 보호 장치가 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반대로 '진보'와 '사회적 향상'을 향한 열마, 심지어 '더 나은 세계'를 향한 열망 때문에 20세기 초의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조차 사회적 품종 개량이라는 개념을 우리에게 용인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의 사상이 진화와 기초 생물학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서 여전히 중요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우리 현대의 위대한 창시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렇지만 바로 그 사상이 자칫 변질되거나 왜곡되어서 뭔가 섬뜩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된다.
무려 60년 넘게 지속된 우생학 시대는 역사상 가장 파괴적이고 살인적인 전쟁에 의해서만 끝 날 수 있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중요한 사상을 평가하고 해석할 때, 단순히 우리의 선입견(예를 들어 다윈을 현대 과학의 영웅으로 간주하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을 떠받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구체적인 내용과 함의와 역사적 용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평가하고 해석해야 하는 필요성을 강조한다.'
다윈의 진화론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영향을 끼쳤다. 오늘 날에도 그 영향력은 계속되고 있다. 과학 이외의 영역에서도 여전히 그러한데 두 가지 영역을 살펴볼 수 있다. 첫번째 영역인 종교는 반다윈주의로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영역은 인간 현상에 대한 모든 원인을 다윈에게서 찾는 것이다. 이쪽 영역에는 진화심리학이라는 것도 있는데 인간이 구석기시대의 과거에 근거하고 있다고 묘사한다. 저자는 진화심리학이 우생학의 냄새가 난다고 이야기한다. 강간에 대한 진화심리학적 설명으로 구석기 시대의 번식에 필요한 행위였다는 그럴싸한 설명을 통해서 주장한다는 것을 보면 이해가 간다.
진화론을 우리의 어느 부분까지 해석하는 합법적인 틀로 규정할 것인가라는 중요한 질문에 도달한다.
다윈은 자연선택은 가능한 진화의 경우의 수에서 한가지 일 뿐이라고 했다.
다윈을 통해서 우리는 생물학의 심장부에는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사상이 꾸준히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윈의 위험한 사상은 오로지 이 사상이 모든 답변을 갖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만 최종적 권위를 지녔다고 이야기 될 수 있는 셈이다.'
이 사상이 다른 어떤 사상보다 특별한 이유는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사상들과 마찬가지로 온전히 존재하지 않고 수정되고 변형된 상태로, 또는 왜곡되고 과장되어 존재했다.
지난 세기 내내 우리는 다윈주의 사상이 계속해서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되는 것을,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새롭고 중요한 통찰을 낳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과학적 완고함과 맹목과 결정론과도 불장난을 벌일 수 있다는 것을 지켜보았다.
더 극단적이거나 또는 무제한적인 다윈주의도 지나치게 실용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역사는 똑똑히 보여준다. 지성도 이런 과도한 행위를 방지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과도한 행위 핵심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우리는 전이나 지금이나 후에나 같은 사람들의 사상을 거론하며 이야기 하지만 모두 다른 식으로 변형되어 해석되고 거론될 것이다. 마치 이는 우리가 이전 사상의 사다리 없이는 새로운 세상으로 올라갈 수 없어 보이는 것 처럼 말이다.
스스로 믿는 것만 보는 선택편향을 하게 되는데 어떤 사상가들의 특정 부분만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곤란하다. 전체 맥락에서 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스스로의 생각에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는 사람들은 생각을 남용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아 보인다.
해밀턴대 제퍼슨
계몽주의와 자유주의 철학에 기반을 둔 이 새로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 몇 사람은 남부 출신으로 대표적인 예가 조지 워싱턴, 제임스 매디슨, 토머스 제퍼슨이었다. 북부에는 존 애덤스와 알렉산더 해밀턴도 자유에 관한 새로운 표준을 설정할 만한 나라를 만들고자 소망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미국의 민주주의에 관여했지만 가장 포괄적인 함의를 다루었던 대립되는 두 전망에 관한 사람을 조명한다. 해밀턴과 제퍼슨은 비슷한 재료로 시작해 서로 다른 길로 나아갔다. 해밀턴은 강력하고 중앙의 권한, 대규모 정규군, 연방이 주도하는 산업 경제,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원했다. 도시적이고 확장적이었으며 제퍼슨은 약한 중앙, 지역 의용군, 자유민 농부들의 나라, 그리고 아무와도 동맹에 얽히지 않기를 원했다. 지방적이고 더 지역중심적이었다.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이 이들을 한데 엮어 주었다면 그 목표를 위한 방법의 차이로 이들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해밀턴은 귀족을 옹호한게 아닌 대의를 옹호했다. 그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않는 국왕의 권력이야말로 반드시 항상 경계해야할 대상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헌법에서 대통령의 임기를 4년으로 한정해야 한다고 거듭 경고했다.
해밀턴과 재퍼슨은 서로 다른 견해 양립하였지만 본질적으로 추구한 바는 동일하다. 그들은 자유와 평등에 기반한 민주주의를 원했으며 그것을 지키기 위한 방법을 놓고 치열하게 싸웠다.
'이성과 경험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단지 본래 의도라는 저 파악하기 힘든 유령을 추구하기 보다는 차라리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의 해석을 토대로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사실 본래 의도라는 것으로 말하자면 그 저자 자신들에게조차 명료한 적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견해 차이를 연구 분석한 많은 자료들이 있지만 그들이 공동으로 추구했던 목표에 대해서 집중해보는 것도 중요하다. 두 사람 모두 자유를 절대 선으로 추구했다. 제퍼슨이 보기에 권력이란 전제성을 향한 끝없는 유혹이었고 권력이 인민의 손에 직접적으로 놓여 있으면 권력은 더 많이 분산되기 때문에 집중과 위협이 불가능했다. 해멀턴도 권력이 유혹적이기 떄문에 한계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가 보기에는 덜 교양 있는 다수와 자기 이익만 챙기는 부자에게 너무 많은 직접적인 권한이 주어질 때 생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는 교육, 보건, 직접, 법치, 안전이 필요했다. 두 사람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나온 경고를 잘 알고 있었다. 즉 누구든 가난해지고 비참해지고 유기되어 버려질 경우, 그 사람은 더 이상 자유롭지 않은 것이었다.
그 사람은 신뢰를 잏고 불가피하게 폭력으로 기울 것이다. 번영없는 자유는 한낱 허울 좋은 말에 불과하다는 해밀턴의 말은 가난을 경계했다는 것을 의미 했다.
제퍼슨이 가난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았던 것에 비하면 해밀턴은 더 큰 세계에 속한 사람이었다.
해밀턴은 실용적인 의미에서 부를 바라 보았고 오로지 시민적 책임을 받아들일 때에만 가치가 있었다. 즉 강도 귀족이나 억만장자 금융가는 선동가 못지않게 파괴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야말로 그 시민들이 미덕을 지닌 인간이 되도록 아울러 번영하는 인간이 되게끔 제공되는 공동체였다. 정치와 윤리학이 완전히 분리되어서는 안 되었다.
워싱턴의 말처럼 미덕이 대중 정부의 필수적인 샘이라고 한다면, 이런 정부는 그 가능성을 보호함으로써 미덕을 되갚아야만 했다. 해밀턴은 나중에 본인의 원칙에 따른 희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는 행위를 했지만 결국 그도 불완전한 한 인간일 뿐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소중한 원칙들을 각자 지니고 있겠지만 그것을 발현하는데 있어서 폭력만큼은 비윤리적인 행위임을 지각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타인에게 스스로가 믿는 원칙이나 믿음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고 설득해야 하는 것이다.
해밀턴과 제퍼슨 양쪽 진영이 지녔던 것은 완전한 이상으로써의 순수한 전망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자유와 민주주의와 합리성이라는 계몽주의적 원칙에 대한 믿음을 공유했으며 이런 믿음이 지켜진다면 타협이 중요하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권력자가 되었을 때 반대 진영의 요구를 들어주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일부분 희생했을 것이다. 물론 그들도 인간이기에 권력을 얻었을 때와 얻기 전의 마음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새로운 세기 들어 제퍼슨주의와 해밀턴주의 사상간의 투쟁은 남북전쟁 이후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 치열해지고 냉혹해졌다.
개인의 자유, 법 앞의 평등, 종교적 관용, 인민의 주권, 권력의 분산 등이 바로 그런 사상 가운데 가장 우선적인 것들이었다. 두 사람이 의견을 달리한 부분에는 각자의 더 엄밀한 해석이 있었고, 그런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각자가 추진한 정책이 있었다.
물론 거기에도 몇가지 중첩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헌법이 거룩한 불멸의 문서라고는 믿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진정한 지식인 답게 미래의 역사는 헌법의 변화를 요구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균형잡힌 둘 제퍼슨주의와 해밀턴주의의 형태에 내표된 계몽주의적 이상의 지속은 벌써 여러 차례 미국을 대규모 퇴보에서 구해냈으며,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둘 중 어떤 사상도 나머지 하나가 없이는 버틸 수 없다.
두 사람이 도입한 사상 사이의 긴장이야말로 (즉 이 사상들이 공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타협과 원기 왕성한 균형이야말로) 미국에 장기적인 역동성을 가장 많이 부여했으며 또한(말썽도 많았고 가끔은 교착되기도 했지만) 두 사람 모두 공유한 희망에 대한 헌신 가장 많이 부여 했음을 깨닫게 된다.
아마 저자는 이 챕터를 통해서 분열되고 있는 미국을 공통의 가치를 상기시켜 분열을 막고 더 생산적인 논의를 위한 토론장으로 이끌고 싶어했던 모양이다. 지금의 분열을 이끌고 있는 근본적인 사상을 통해서 그들이 서로 다른 주장을 통해서 대립했지만 그 속에는 공통의 가치가 있었으며 그 가치를 벗어난 논쟁이 되길 원하지 않길 바라는 것 같다. 논쟁 중일 때 가끔씩 출발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논쟁이 각자의 이익이 아닌 공동의 이익과 가치에서 여전히 맥락을 유지하고 있는지 말이다.
반계몽주의
계몽주의 시기를 넓게 잡으면 1650년대 부터 19세기 초까지, 좁게 잡으면 18세기로 볼 수 있다. 점진적인 찬란한 가능성으로 나아가던 희망이 20세기에는 완전히 정반대에 가까운 뭔가가 나타났으며, 문명 자체가 거의 파괴될 뻔 했다.
이런 현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국독립혁명과 프랑스혁명은 세계 정치를 변모시킨 급진적 사건으로 간주되는 데 그 중 프랑스 혁명이 바로 현대의 반동적인 사상 계열로 성장하게 된다. 이 반응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상징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며, 20세기 이르로 정치적으로 파국적인 결과를 낳았다.
오늘 날까지 이 적대감은 존재하며 계몽주의적 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의 강력한 토대가 되고 있다.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혁명에 대해 경고를 보냈다. 그는 미국의 독립혁명은 미국인의 소망이 충분한 정당성을 갖추었다고 생각했지만 프랑스혁명은 자국과 그 안정성의 근거가 되었던 모든 사회적, 정치적 제도와 전통을 갑자기 내던져버리고 말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추상적 계몽주의 철학을 이용하여 완전히 새로운 사회질서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섣불리 과거에 대한 존경의 원칙을 제거하다 보면, 결국 혼돈과 폭력으로 퇴보할 수 밖에 없다. 버크는 전통을 옹호하는 동시에 극도록 혁명적인 모든 변화에 반대하여 이렇게 주장했다.
과거의 의견과 생활 규범을 내던질 경우, 그로 인한 손해는 차마 측정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크다.
반대하는 그들은 상업주의 노동자가 주인의 보살핌을 받는 노예보다 더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고 보았다. 계몽주의적 자유주의는 적절한 질서의 적으로, 즉 인간 본성에 반하는 거만한 무종교로 정의된다.
이런 반동은 내셔널리즘을 조장하는 상황에서 더욱 힘을 얻게 된다. 내셔널리즘은 국가에 의해 지배되는 모든 민중은 실제로 거대한 가족의 일원이며, 이들은 공통의 문화, 공통의 가치, 그리고 유럽 대부분에서는 공통의 선조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에게 이런 사실을 이해 시키기 위해 내셔널리즘 역사가 조작되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르러 모든 강대국은 자국이 계속 강력한 상태로 남아 있으려면 경제를 현대화하고 내셔널리즘을 주입하고 대중의 지지를 동원할 피룡가 있음을 인식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이 사상은 독재 정권의 보전이 점점 더 군국화한 국수주의에 근거하게 되었다.
파시즘의 다양한 형태의 공통 요소는 폭력과 직접 행동과 극단적 내셔널리즘에 대한 존경이다. 전통관습 미화, 국가의 신화적 기원, 인종적 순수성을 예찬하고, 영웅적 국가 지도자에 대한 숭배를 예찬한다.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나타내는 것도 중요한 요소이다.
국가적인 영예보다 돈에 더 관심이 많은 상업적인 마음가짐을 지닌 무신경한 부르주아지에 의해 지배된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니체를 친파시니스트라고 하는 것은 잘못인데 그는 나중에 실제 파시스트 운동으로 나아간 방향을 분명히 거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히 그는 관용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유물론에 대한 니체의 극력한 혐오는 정확히 그 방향의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제공한 것이 틀림없다.
폭력에 대한 선망, 강력하고 단호한 지도력을 향한 열마, 국수주의, 남성적 호전성, 다양한 시각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고려된 합리성을 중시하는 나약한 관용에 대한 거부, 이런 요소들은 이탈리아와 독일 두 나라에서 전지전능한 지도자인 인물 주위에다 다양한 내셔널리즘적 이데올로기들을 접합 했으며,
상반되는 경제적 사회적 목표들까지 접합시켰다. 계몽주의에 적대적이었던 지식인들이 개진한 이런 사상들이 제1차 세계대전보다 훨씬 먼저 더 단순 무식하고 더 대중적인 간행물을 통해 유포되면서 훗날 파시즘의 등장으로 나아가는 길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1930년대 내내 그 확산을 정당화했다.
이러한 현상 가운데 당혹스러운 점은 매우 저명하고도 명석한 지식인 가운데 일부가 파시즘에 매료되었다는 사실이다.
1차 세계대전 이전 관점에서 보면 물질적 행복의 증대는 계급갈등을 동반했기 때문이고, 또한 도시화화 산업화가 전통적인 가족과 공동체의 유대를 약화시키기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더 나은 교육 덕분에 불평등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또한 전통종교가 더 이상은 그 타당성에 대해 답변을 내놓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며 특히 과학의 진보가 종교적 교의의 가치에 갈수록 커지는 의심을 제기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래 보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비록 계몽주의가 엄청난 기술적 진보를 가져온 것을 확실했지만
정작 전반적인 개인의 해방과 자유의 이상에 가까운 뭔가를 만들어내는 데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현대화가 그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앨버트 허시먼은 반동의 거대한 물결을 세가지로 구분하였다.
프랑스혁명처럼 과도함에 저항하는 물결, 현대화를 지향하는 산업화에서 비롯된 사회 변화와 민주화에 저항하는 19세기 말의 물결이며, 세번째는 1980년대에 서양 복지 국각들의 외관상 과잉관료제화에 저항하여 비롯된 사회 변화와 민주화에 저항하는 19세기 말의 물결이며
1980년대에 서양 복지 국가들의 외관상 과잉관료제화에 저항하여 시작된 이래, 증대하는 세계화에 저항하여 지금도 계속되는 물결이다.
두번째 물결은 평등주의의 좌퐈와 현대성의 급진적 변화를 거부한 우파에서도 나왔다. 그래서 파시즘은 본래 우파도 좌파도 아니다. 그저 싫은 것에 대한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유로 내세울 뿐이다.
계몽주의적 자유주의가 더 이상은 좋은 답변을 제공할 수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현대성의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는 공산주의 극좌파나 파시스트 극우파 또는 양쪽의 어떤 조합이 오히려 가망성있어 보였다.
문제가 많은 지도자들에 의해서 훼손된 자유민주주의의 무능과 부패와 잘못된 결정 때문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에게 이런 사상은 너무 매력적이다.
이런 정황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렇기에 반계몽주의 이데올로기야말로 진지하게 분석하고, 이와 동등하게 학식 있고 설득력 있는 논증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더욱 필수적이다.
계몽주의를 반대했던 사람들은 종교가 가지고 있는 사회근간을 이루고 있는 전통과 문화를 무너뜨린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다. 실제로 그들에게 도덕적 행동의 근간이 되던 종교가 사라지면서 그들은 그 텅빈 공간속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 처럼 보인다.
이 와중에 상업주의에서 나타난 불평등은 텅빈 공간을 분노로 채운듯이 보이고 이러한 현상이 프랑스혁명과 같이 과격하고 피참한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상업주의에 따른 소외감과 계몽주의에 따른 믿음에 대한 종교의 상실감은 반계몽주의와 반자유주의를 유발하는 주요한 요인으로 보인다.
'따라서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는 일관성이 있는 교의에 호소하기 보다는 본능적인 감정에 호소한다.'
기독교 근본주의 / 이슬람교 정화
근본주의자는 성서의 문자적 진실성에 대해서와 다른 종교의 타당성과 가치 결여에 대한 비타협적인 경향이 있다. 이들은 현대 과학의 상당 부분을 부정하고 그 대신 그리스도의 재림을 핵심사건으로 삼는 신성한 계시에 근거한 이런저런 종말론을 내세운다.
기독교 근본주의와 이슬람교는 현대의 지성주의를 거부한다는데 공통점이 있다. 단지 기독교 근본주의는 미국이라는 현실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이슬람교 처럼 폭력적이지 않다.
하지만 이 세력이 언제든지 권력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고 영향력이 다수가 된다면 급진적으로 변할 것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반자유주의와 분노를 공유하고 있다. 차이는 단지 지금 폭력적으로 보이는지 아닌지일 뿐이다. 그들의 영향력이 커지면 어떤 식으로든 현대의 문명을 저버리고 퇴보하려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 믿음이 현대와 조화를 이루지 못해서 생기는 것 처럼 보인다.
종교는 우리에게 오랜 시간동안 많은 문화와 도덕적 행동의 기반을 제공했지만 계몽주의 이후로 그 영향력은 줄어들고 있다. 이제는 미미해진 영향력은 무시해도 될 것 처럼 여겨지곤 하지만
오늘 날 같이 불평등이 만연한 상화에서는 교육을 통한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지니게 될 것이고 따라서 불만을 해결하지 못하면 불만에 대한 표출을 통해서 어떤 식으로든 기존의 체제를 전복시키려 들 것이다.
과거의 수 많은 일화를 통해서 그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였고 아직까지는 효과적으로 차단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위협은 남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살펴야 할 것이다.
과거의 폐해가 고개를 들고 우리 삶 저변을 차지하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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